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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름처럼 천천히 가는 것 같아요.” 이지상, 임창재 감독의 단편영화에 출연하면서 서정은 제 이름을 새로 지었다. 예명이니 무슨 뜻이 있는 건 아니었다. 평소 어감이 좋았던 ‘서’ 자를 따서 성으로 썼고, 본명에서 한 자를 따와서 ‘정’이라는 외자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어느 날 배우로 살았던 10여년의 삶을 돌아보니 남들보다 한참 느렸다. <박하사탕>을 시작으로 <섬> <거미숲> <녹색의자>, 그리고 곧 개봉을 앞둔 <경계>까지 출연작을 세어봐도 얼마 안 된다. 물론 다른 배우들처럼 스타덤의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섬>을 끝내고 난 직후에는 그의 집 앞에 매니지먼트 회사들이 자신의 소속사로 오라며 러브콜을 경쟁적으로 보내기도 했고, 한때 그 또한 시류에 따라 TV에도 얼굴을 내밀었으나, 그닥 큰 흥미나 자극을 느끼지 못했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무 뜻이 없던 ‘서’가 ‘천천히 서’가 아닐까 싶었던 것
[서정] “감정이 말라 비틀어질 정도로 꾹꾹 눌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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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원의 영화는 위험했다. 강원도 시골 총각으로 분한 <그녀를 믿지 마세요>의 희철이나, 반항과 애교를 함께 품고 있던 <늑대의 유혹>의 태성, 사형수의 세월을 눈물과 사랑으로 토해냈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윤수는 모두 강동원이란 피사체가 갖고 있는 이미지를 배반하고 위협했다. 큰 키와 작은 얼굴, 여리게 떨어지는 팔과 몸의 라인은 영화란 텍스트를 담아내기에 서툴러 보였고, 슬랩스틱코미디(<그녀를 믿지 마세요>)의 친근함, 애달픈 사랑(<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뜨거운 눈물은 마치 그의 것이 아닌 양 어색해 보였다. 그의 정적인 이미지를 최대한 살려낸 영화 <늑대의 유혹>에서조차 그는 애교 섞인 대사와 누나란 호칭 앞에서 왠지 주저하는 것 같았다. 웃음을 주기에 그는 냉정해 보였고, 사랑을 하기엔 다소 무심해 보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도 두 남녀의 애절한 사연보다는 강동원과 이
[강동원] 미스터리를 유영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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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양해훈이 누구기에?”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양해훈 감독과 그의 장편 데뷔작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는 지난해 연말부터 올해 10월까지 잊을 만하면 되새겨지는 이름이었다. 2006년 서울독립영화제와 인디포럼에서 화제작으로 떠오른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는 올해 5월 전주국제영화제에서는 ‘관객영화평론가상’을 받았고, 지난 10월12일에 폐막한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와이드 비전 부문에서 상영되었다. 게다가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를 편집하던 도중에 만든 단편 <친애하는 로제타>는 한국영화로는 6년 만에 칸국제영화제 단편경쟁 부문에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제 순방의 해로 보낸 지난 시간이 양해훈 감독에게는 그다지 즐겁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사실 영화제가 별로 재밌지는 않다. 나는 그냥 관객을 만나서 내 이야기를 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즐겁더라. 그외 다른 건… 글쎄… 축제가 끝나고 생기는 허망함이 오히려 짙은 것
[양해훈] “당분간은 현실에 발을 붙인 판타지를 만들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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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댄스 관객상 수상 이후 올해의 인디영화로 꼽힐 정도의 흥행을 기록한 음악영화 <원스>의 신데렐라 이야기가 지구 반대편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난 9월20일 국내 개봉하여 3주 만에 6만명의 관객을 끌어모았고, 10개관이었던 개봉관은 시간이 흐를수록 늘어나 지난 10월11일에는 17개에 이르렀다. 거리의 악사와 그의 음악을 알아본 이민자 소녀의 수줍은 사랑 이야기에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불어넣은 것은 바로 음악. 이 성공담의 진짜 주인공을 존 카니 감독이 아닌, 두 주연배우 글렌 한사드(남자)와 마르케타 이글로바(소녀)로 꼽아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아일랜드의 유명 밴드 ‘더 프레임즈’(The Frames)에 몸담았던 카니 감독은 자신의 초저예산 장편이 성공하기 위해 실제 뮤지션이 배우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밴드의 리더이자 감독의 오랜 친구 글렌 한사드가 합류했고, 한사드는 체코 순회공연 때 만난 마르케타 이글로바를 끌어들였다. 영화보다는 음악을, 대중적 성
[글렌 한사드, 마르케타 이글로바] “관객도 보는 내내 우리의 우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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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궁녀>는 지엄한 경고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궁녀로 궐에 들어오면 살아선 궁을 나가지 못한다”, “궁녀가 정절을 지키지 못하면 참형에 처한다”. 영화 속의 궁녀와 영화 밖의 관객에게 궁녀의 삶이 가진 비통함을 일러주는 이 목소리는 배우 김성령의 것이다. 1988년 미스코리아 진으로 당선된 뒤 영화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로 연기생활을 시작했지만, 그녀에게 <궁녀>는 자신의 두 번째 영화였던 <숲속의 방> 이후 15년 만의 영화계 복귀작이다. “정말 너무하지 않나? 왜들 그렇게 안 찾아주시던지… 내가 그 15년을 울면서 보냈다니까. (웃음)” 그녀의 말대로 극중에서 감찰상궁으로 분한 그녀의 연기는 지금껏 좋은 배우가 없다고 투덜거리던 한국 영화계가 얼마나 게을렀는지를 깨닫게 만든다. 궁녀들의 잘못을 단속하고 궁궐의 소란을 막는 한편, 그 자신도 권력에 기대려는 욕망을 품은 감찰상궁은 ‘쥐불이글려’라는 궁녀들만의 입단속 행사를 주관
[김성령] “어느 순간 나도 오기 같은 게 생기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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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영과 대화를 트는 일은 별로 쉽지 않다. 그는 깐깐하고 딱딱한 주제를 건드리는 대화에 얼른 호기심을 느끼는 타입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재영은 단순한 얘기를 좋아하고, 허허실실한 농담의 리듬을 한번 타기 시작하면 넘실넘실 그 리듬을 계속 이어간다. 바깥에 쏟아지는 소낙비 소리에 묻힐 만큼 나지막한 목소리로, 느린 말투로, 꾸준히. <웰컴 투 동막골>(2005), <나의 결혼원정기>(2005), <마이 캡틴 김대출>(2006), <거룩한 계보>(2006) 그리고 장진 감독의 조감독 출신, 결국은 장진 패밀리의 일원인 라희찬 감독의 데뷔작 <바르게 살자>(10월18일 개봉예정)에 이르기까지 그의 최근 커리어를 보면 가장 먼저 읽히는 건 안정된 직업배우로서의 성실함이다. 김유진 감독의 사극 <신기전>을 찍으면서 “지금까지 했던 걸 다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액션”을 하느라 살이 많이 내린 그는, 얇은 이목구비가 도드라진 얼
[정재영] 유쾌한 그 남자의 리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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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리양 감독이 최근 폐막한 서울국제영화제에 맞춰 한국을 찾았다. 서울영화제에서 선보인 <맹산>은 인신매매범에게 속아 산골 마을에 신부로 팔려가 겁탈당한 뒤 갇혀 사는 한 여인이 자유를 향해 탈출을 벌이는 이야기를 그린다. 올해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상영돼 5분 이상의 기립박수 세례를 받았던 이 영화는 중국 광산에서 벌어지는 비인간적인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한 데뷔작 <맹정>(2003)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 거듭되는 실패와 갖은 고초 속에서도 자유를 위해 산골을 탈출하고 또 탈출하려는 <맹산>의 여주인공은 마흔이 넘은 나이에 데뷔했지만 묵묵하게 “중국의 현실을 고발하고 최하층민들의 삶을 보여주는” 영화를 꾸준히 만들고 있는 리양 감독 자신인지도 모른다. 2003년 부산영화제와 올해 칸영화제에 이어 세 번째 만남을 갖게 된 것은 그런 궁금증을 시간의 여유를 가진 채 풀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칸영화제에서 만났을 당시 <맹
[리양] “순수했던 사람들의 인성이 변하는 모습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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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때부턴가 박진희는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세일러문처럼 누볐다. 찰랑거리는 생머리와 팔등신 몸매 때문이 아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선은 전혀 청초하지가 않다. 굵직굵직하긴 해도 전혀 가녀리지 않지. (웃음)” 대신 박진희는 드라마와 영화에서 올곧은 이미지로 정의의 길을 가르쳤다. <돌아와요 순애씨>에서 순애의 영혼을 받은 초은은 아줌마다운 배짱과 가치관으로 ‘젊은 것’들을 계도했고, <쩐의 전쟁>의 서주희는 돈을 향한 욕망으로 얽힌 사람들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돈과 거리를 두려는 인물이었다. 남한사회에 떨어진 간첩한테 운명을 빌려주는 <간첩 리철진>의 화이는 어떤가. 심지어 <여고괴담>의 소영 또한 이기적인 전교 일등이면서도 사건을 침착하게 바라보는 여고생이었다. 실생활에서도 그녀의 대쪽 같은 성미는 종종 에피소드를 만들곤 했다. 폐수가 흐르는 현장을 목격하고 구청직원을 달달 볶아 결국 시정하게 만든 건 이미 유명한 일화. 말하자면 박진희는
[박진희] 정의의 이름으로 연기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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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핑 베토벤>의 주인공으로, 베토벤(에드 해리스)의 말년을 함께한 악보 필사가이자 작곡가 지망생 안나 홀츠(다이앤 크루거)는 명백한 가상의 인물. 처음으로 베토벤의 악보를 필사한 그녀는, 어째서 멋대로 바꾸어 필사했냐고 묻는 베토벤에게 말한다. “바꾼(change) 것이 아니라 고친(correct) 것”이라고. 아그네츠카 홀랜드는 대선배의 명성에 짓눌리지 않고 그의 세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안나 홀츠처럼 이 영화를 완성했다. 이런 삶을 살았다면 그의 말년도 조금은 행복했으리라는 가정은, 베토벤의 음악 세계를 좀더 잘 드러내는 훌륭한 도구다. 폴란드에서 태어나 체코에서 영화를 공부한 홀랜드는 <세 가지색 블루> <세 가지색 화이트> <당통> 등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안제이 바이다 등의 영화에 각본가로 참가했다(<카핑 베토벤> 속 안나와 베토벤의 관계에 자신과 안제이 바이다의 애증어린 사제지간이 암시된다). 살기 위해 나치가
[아그네츠카 홀랜드] “성공하기 위해 우리 여성들은 좀더 강하고 훌륭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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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형이었는데 검사해보니까 A형이래요.” <행복>의 임수정은 말한다. “원래는 활발했는데 그거 알고 나니까 소심해졌다”고. 물론 극중 은희의 대사다. 하지만 <행복>은 은연중에 임수정을 의식한다. “이래 보여도 나이가 많”고, “봐줄 사람이 없단”다. 임수정은 영화 <장화, 홍련> <…ing>,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 등으로 빚어놓은 다소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행복>의 은희를 빌려 부정한다. 몸빼를 입고, 건강 체조를 하며, 끝없이 주는 사랑에 눈물을 쏟는다. 보이지 않았던 은희의 얼굴이 임수정의 혈액형을 부정하는 순간이다. 특히 은희는 현실에서 한발 떨어져 신나게 놀다온 영군(<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직후다. 그녀는 자신을 포장해온 고독과 상처, 두려움의 끝에서 무엇을 본 걸까. <행복>을 보는 내내 임수정이 흥미진진해졌다.
-기술시사 때 영화를 보러 왔던데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임수정] “<행복>은 내가 가진 걸 벗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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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영수에게선 황정민의 몇 가지 얼굴이 겹쳐오른다. 영수는 <너는 내 운명>의 석중처럼 사랑에 기뻐하고, <바람난 가족>의 주영작만큼이나 여자에게 비겁하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의 나두철만큼 소심한 한편, <사생결단>의 도경장처럼 거칠기도 하다. 하지만 이 잔인한 러브스토리의 악역인 영수는 그 누구보다도 <달콤한 인생>의 백 사장처럼 “인생은 고통이야. 몰랐어?”라고 묻는 남자다. 그것은 영원한 사랑의 행복을 꿈꾸는 은희에게 묻는 말이자, 사랑이 아름답다고 믿는 관객에게 일갈하는 질문이다. 아마도 황정민은 <행복>에 빠져사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행복을 주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 너 사랑해도 되냐?”고 묻는 <로드무비>의 대식처럼.
-<행복>의 개봉이 예정보다 많이 늦어졌다. 어제 있었던 기술시사까지 영화를 볼 수도 없었을 텐데, 초조한 기분은 없었나.
=전
[황정민] “<행복>은 솔직히 까놓고 가는 이야기라 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