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날 나는 학원에서 보는 모의고사를 망치고 과음을 했다. 술에 취한 채로 집에 들어갈 수 없어서 어디서 술을 깨고 갈까 고민하였다. 내 고민의 끝은 극장이었다. 술로 깔깔해진 입 안을 헹구기 위해 콜라라도 마시려고 매점 앞에 섰다. 매점 안은 텅 비어 있었다.극장 안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스크린에서는 당시 섹스어필의 대명사였던 남자 배우가 지적인 바람둥이 역할을 연기하고 있었다. 극장 안을 살피다 말고 잠이라도 좀 자볼까 하고 고개를 돌리는데 같은 줄에 여자가 혼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하얀 블라우스가 스크린에서 비치는 빛을 따라 울긋불긋 변하였다.매점 여자였다. 나는 그녀가 삼류극장 매점에 앉아 있긴 하지만 이런 영화는 전혀 안 볼 거라 생각해오던 터라, 그녀를 발견하곤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얼마전 극장에 왔을 때 불쾌한 마음을 먹었기 때문인지 곧 콧방귀를 흥 하고 뀌었다. 이미 잠을 잘 생각은 달아나버렸다. 나는 여자를 흘낏흘낏 곁눈질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술김에
<애마부인> 20주년 단편소설 (2)
-
며칠 전 회사에 방이 붙었다. 기획위원 홍세화, 편집부국장 김훈.<씨네21>이 한겨레신문 소속이긴 하지만, 매체 성격도 특수한데다 구성원도 대부분 특채로 들어온 외인부대여서, 회사 돌아가는 사정은 잘 모른다. 방이 붙고서야 이 두 사람이 <한겨레>에서 일하게 됐다는 걸 알게 됐다. 이건 드물게 아주 재미있고 반가운 일이었다. 난 두 사람을 개인적으로 전혀 모른다. 오직 그들의 글(또는 글로 정리된 그들의 말) 중의 일부를 만났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두 사람을 좋아하고 있었다.홍세화씨의 이름은 많은 독자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라는 그의 책으로 알게 됐다. 그는 남민전이라는 70년대 아주 무시무시한 조직사건에 연루돼 프랑스로 망명했고, 파리에서 택시운전사로 일하면서 먹고산 사람이다. 나는 비운의 혁명가, 망명객이라는 호칭이 주는 그 아득한 매혹과 콤플렉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세대에 속한다(이번호에 소개된 명필름의 이은 감독도 그
좌우
-
<가벼운 숨결> 줄리아 하트롤리팝뮤직 발매제목대로, 젊은 날의 감성을 ‘가벼운 숨결’처럼 풋풋한 모던록 사운드에 실어 전하는 줄리아 하트의 첫 음반. ‘볼빨간’이라는 예명의 솔로 프로젝트로 잘 알려진 서준호가 지난해에 설립한 롤리팝뮤직에서 제작했다. 드럼에 서준호, 기타와 보컬에 언니네 이발관 출신의 정대욱, 베이스와 보컬에 코스모스 등을 거친 이원열, 이 세 멤버는 물론 세션들까지 대부분 홍익대 앞에서 활동해온 모던록 밴드 출신. 가볍게 탄식하듯, 가벼운 설렘으로 떨리듯 쟁쟁거리는 선율과 맑은 서정을 담은 가사가 매력적이다.<Sings The Luiz Bonfa Songbook> 이타마라 쿠락스헉스뮤직 발매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과 더불어 보사노바의 선구자로 꼽히는 브라질의 음악가 루이스 본파의 음악을, 브라질의 재즈 보컬 이타마라 쿠락스가 부른 음반. <정사>의 삽입곡으로 알려진 <Manha de Carnaval> <Samba de
[음반]<가벼운 숨결> 줄리아 하트/ 이타마라 쿠락스/ 앙드레 가뇽
-
<신중현 콘서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2월12일 6시, 13일 3시·6시/ 메인기획/ 031-871-1964<빗속의 여인> <커피 한잔> <님은 먼 곳에> <미인> 등의 명곡을 탄생시켰던 한국 록음악의 대부 신중현. 이제껏 신화적인 명성으로만 알려졌던 그의 40여년 발자취를 남김없이 보여줄 콘서트가 열린다. 이번 공연의 음악은 물론, 세트, 조명까지 직접 연출, 신화에서 현실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나오는 신중현을 볼 수 있다. 신중현의 큰아들 신대철이 이끄는 그룹 시나위와 이정현이 게스트로 참여한다.<얀 가바렉과 힐리어드 앙상블 내한공연>예술의전당 콘서트홀/ 2월17일 4시/ 크레디아/ 02-751-9606재즈와 클래식의 만남. 키스 자렛의 <마이 송> 색소폰 연주로 유명한 노르웨이 출신의 색소포니스트 얀 가바렉과 1974년 결성된 영국의 중세, 르네상스 전문 남성 4인조 보컬인 힐리어드 앙상블이 첫 내한공
[공연] 신중현 콘서트 / 얀 가바렉과 힐리어드 앙상블 내한공연
-
-
프랑스 대중에게 가장 인기있는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알베르 자카르가 들려주는 과학 이야기.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계산과정의 오류들, 숫자가 갖고 있는 결정주의적 속성, 인종주의와 아이큐에 대한 이야기들을 통해 진정한 교육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소크라테스와 노예의 예를 들어 ‘2의 제곱근’을 설명한다든지, 기원전 3세기에 에라토스테네스가 지구의 둘레를 잰 방법 등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과학이 즐거워진다.
[책]과학의 즐거움
-
올리버 스톤이 60년대의 문화를 ‘총괄’하겠다며 만든 영화는 <도어즈>였다. <People Are Strange>와 <The End>를 부르던 짐 모리슨의 서늘한 목소리. 술과 마약, 섹스로 자신을 파멸의 길로 몰아갔고 마침내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27살에 죽어간 남자. 자유와 반항으로 표상되는 60년대 대중문화의 아이콘.90년대의 ‘세대의 목소리’를 떠올린다면, 그건 분명 커트 코베인이다. 짐 모리슨, 지미 헨드릭스, 제니스 조플린처럼 27살에 죽어간. 거친 목소리로 이미 파괴된 자신을, 패배자(loser) 세대의 분노와 절망을 중얼거리고 비명처럼 외치던 남자. 유서에 적은 ‘점차 희미하게 사라지기보다 한순간에 타버리는 것이 낫다는 것을’이란 말을 실천했던, 90년대 청춘의 지독한 자화상.90년대는 부정과 분노로 가득 찬 X세대의 것이었다. 너바나는 완강한 기성사회의 벽에 부딪혀 신음하던 그들의 분노와 저항을 얼터너티브 록에 담아내며 선풍적인 인기를
타버린 불꽃, 남은 불씨 <커트 코베인 지워지지 않는 너바나의 진실>
-
최근 몇년 동안 고은의 시는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김대중 정부 수립 직후부터. 그가 ‘김대중 정부 시인’인 듯 비쳐졌을 때부터다. 정치와 문학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다, 라는 것은, 당연히 거리를 전제한 명제다. 그 거리가 관계를 허용하고 만남의 변증법을 요구하는 까닭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내게 ’너무 정치적’인 고은의 시는 행태와 구분되지 않았고 거꾸로도 마찬가지였던 걸 게다.그런데, 이번 시집 제목이 요상하고 흥미롭다. ‘두고 온 시’라. 뭔가 다른 얘기를 좀 하시려는가…. 그런 생각쯤으로 미적미적 시집을 뒤져 읽는데 갈수록 신기하다. 어허, 이런이런…. 그렇게 감탄 혹은 탄식을 하다가 나는 흡사 정신을 차리려 기를 쓰는 듯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어허, 허랑방탕, 광대무변, 허랑방탕, 광대무변… 그러다보니 꼭 색즉시공공즉시색을 되뇌는 중과 다를 바 없다.나를 그렇게 만든 것은 많은 평자들이 얘기했던 그 반성조, 이를테면 12쪽 ‘최근의 고백’의 ‘한밤중 혼
고은 시집 <두고 온 시>
-
오늘은 <와이키키 브라더스>에 관해 영화음악 이야기도 하겠지만 영화 자체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좀 하겠다. 영화 자체가 음악에 관련되어 있으므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이 지면에서 가능하리라 판단해서이다.이름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직도 ‘밤무대 예술인 연합회’ 비슷한 단체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후배 중에, 몇해 전 그 단체의 회장을 하던 분이 세상을 뜨는 바람에 그분이 쓰던 기타를 물려받은 친구가 있다. 그 친구가 보여준 그 기타는 고색창연한, 그러나 엄청난 아우라를 지닌 금색 팬더 스트라토 캐스터였다. 어느 인터넷 클럽에 가입하면, ‘00호텔 무빙팀 싱어 구함 숙식 제공 29세 이하’ 등등의 제목이 붙은 메일을 하루에도 몇건씩 받을 수 있다. 재즈 드러머를 지향하는 후배 하나는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수원 어딘가 나이트클럽에서 밤무대 예술인 노릇을 얼마간 한 일이 있는데, 돈을 꽤 벌긴 했지만 빤짝이를 입어 피부병이 생겼다고 했다….내가 아는 몇 가지 일화
<와이키키 브라더스> O.S.T
-
80년대 스포츠 극화와 기업만화가 불러일으킨 호쾌한 바람에 비하면, 90년대 한국 남자만화의 나날은 지지부진했다. 대본소 공장제 만화가 열심히 파들어간 그 자리가 찬란한 금광의 터전이 되기는커녕 그들의 무덤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90년대 중반 <드래곤 볼> <슬램덩크> 등의 도움으로 열린 만화 단행본 시장에서도 그들은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했고, 연이은 각종 파동으로 인해 지금은 무릎뼈가 꺾이는 상황에 이르렀다.그럼에도 그들 속에서 새로운 발전의 흐름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한국만화 작가군의 한 부분은 외형적, 기교적인 면에서는 일본만화에 비해 전혀 뒤질 것이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일본만화의 영향력이 한국만화와 일본만화의 외형적인 차이를 거의 없앴다는 점은 우리에게 만화적 독자성을 상실했다는 자괴감을 갖게 만드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 독자성을 잃어버린 대가로 훌륭한 실력을 가진 그림작가가 일본이나 그 영향력 아래에 있는 동아시아 시장에 진
남성만화의 광포한 쾌락
-
일본 만화의 신, 데즈카 오사무의 최고 걸작 <불새>가 국내에 번역·출간된다. 수십년의 작품생활을 통해 일본만화의 원형을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가장 방대한 영역에서 가장 다양한 세계를 그려낸 데즈카 오사무의 필생의 역작이다. 60년대 후반 극화의 선풍이 밀려오고 <가로>를 중심으로 한 예술만화의 영역이 개척되면서, 데즈카는 스스로 자기 작품의 한계를 깨닫게 된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간 그는 <COM>이라는 실험적인 만화잡지를 창간하고, 그뒤 오랫동안 <불새>를 통해 종교와 철학의 문제를 만화 속에서 풀어나가고자 했다. 비슷한 주제의 <붓다>가 실존 인물과 사건을 중심으로 엮어져 있다면, <불새>는 데즈카의 만화적 상상력을 극한으로 몰고가면서 실로 심오한 주제를 쉬운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다.<고르고13> 국내 정식 발간 60년대 후반 등장해 <루팡 3세> 등과 함께 최고의 프로페셔널 만화의 자
데즈카 오사무의 <불새> 출간
-
‘판타지(fantasy)물’이라고 하면 흔히들 <반지의 제왕>이나 <디아블로>처럼 드래곤과 마법, 중세풍 기사들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겠지만, 엄밀히 말해 ‘판타지물’이란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통칭하는 의미로 ‘SF’나 ‘가상역사소설’, ‘동물우화’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아이들의 필독도서가 된 지 오래인 <이솝우화> 역시 이러한 ‘말하는 동물’이라는 비현실 소재가 차용된 ‘판타지물’인 것이다.만화와 애니메이션에서는 의인화되거나 사람의 말을 하는 동물캐릭터가 다른 어떤 장르보다 자주 등장한다. 일단 특징을 잡아 디자인하기가 쉽고 일반적으로 각각의 동물에 대한 고정관념에 따른 성격 배정이 쉽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동물에 대한 이미지들은 어릴 적 보았던 우화의 영향이 크다보니 여우는 간사하고, 곰은 미련하다는 식으로 편향적으로 되게 마련이고, 그것은 그림 및 디자인이 가해지면서 더욱 고정화된다.<워터쉽다운의 토끼들>은 197
생존에 대한 집착, <워터쉽다운의 토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