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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깊이, 더 넓게 보기 위해, 영화를 접고 책을 펴야할 때가 있습니다. 영화의 본질을 사유하는 장, 거장의 비밀을 엿보는 장, 주요 영화나라의 원동력을 꿰뚫는 장, 이 장들의 경계를 들며나며 우리는 스크린 더 안쪽으로 들어갑니다. 오즈의 초상화, 감춰졌던 조각들 <감독 오즈 야스지로> 하스미 시게히코 지음/ 윤용순 옮김/ 한나래 펴냄<감독 오즈 야스지로>는 지금까지 너무나 당연하게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오즈, 그러니까 우리로부터 박탈당했던 오즈를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인 하스미 시게히코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단조롭고 결여되어 있는 건 오즈의 영화가 아니라 그것을 보는 우리의 눈동자 자체라고 말한다. 그가 밝히고 있는 바에 따르면 오즈의 영화는 빈약한 영화, 부자유스런 영화, 부정에 의해 정의될 영화가 절대 아니라 풍부한 영화, 자유로운 영화, 영화의 한계까지 다가간 영화이다. 이런 논의가 가끔은 정당한 의구심을 자아내지 않
영화평론가 홍성남을 살찌운 10권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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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인생에 앞 설수 없는 것처럼-물론 트뤼포 같은 예외도 있지만- 음악이 영화에 선행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잊혀져도 음악은 잊혀지지 않을 수 있고, 음악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영화도 있습니다. 2001년 한해를 다 보낸 지금, 영화보다 더 길게 남은 음악들. 그리고 영화의 불명예를 지운 음악들. 비욕, 순진한 퇴폐의 매력 <어둠 속의 댄서> 유니버설뮤직 발매O.S.T로서만이 아니라 2001년에 나온 음반 가운데서도 베스트의 하나로 꼽고 싶은 앨범. 나의 대학 동창 하나를 닮은 비욕은 유럽 북쪽에 분명히 흉노족 같은 오랑캐가 쳐들어갔었음을 방증하는 가수. 그녀의 매력은 그녀만의 것. 발랄함과 발칙함을 순진무구함과 섞어 가지고 있는 사람이 비욕이다. 엄청난 에너지를 동반하며 폭발하는 순진한 퇴폐, 뭐 그런 것. 누누이 말하지만 지금은 ‘사운드’의 넓이 안에서 음악이 움직이고 있다. 음악은 사운드의 꽃이 아니다. 사운드의 일부일 뿐이다. 일상적인 소음까지를
대중음악평론가 성기완이 못 잊는 O.S.T 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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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20년 전, 첫 번째 애마가 말을 달렸다. 안소영은 말한다. “내가 굴욕감을 무릅쓰고 잠자리를 요구할 때마다 당신은 냉정하게 거절했어요. 저도 사람이에요. 당신과 똑같이 하겠어요.” 가부장적 도덕률로부터 관능을 해방시킨 선언은 그렇게 시작된다. 젖은 입술, 게슴츠레 풀린 눈동자, 살포시 드러난 속살에 남자들은 넋을 잃었다. 그녀의 복수는 부드럽고 짜릿하고 황홀했다. 아랫도리가 뜨거워지는 바람에 불그레 얼굴이 달아오른 사내들은 고개를 숙인 채 극장문을 나섰다. 부끄러워 극장 간판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던 여자들도 애마가 유혹하는 시선을 느꼈다. 그녀들도 극장의 어둠 속에서 안소영의 몸을 빌려 성애의 숲을 가로질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해방감이 온몸을 휘감았다.애마의 가슴에 매달려 걸음마를 배웠다82년 2월6일 서울극장에서 개봉한 <애마부인>은 6월11일까지 4달간 장기상영하며 31만명이 넘는 관객을 불러들였다. 개봉관 상영이 끝나면 재개봉관에 걸리던 당시 극장의
불능의 시대 밤의 여왕 <애마부인> 20년, 그 환각과 도피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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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도 그랬지만,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성소)의 제작을 시작한 이후 장선우 감독이 `스캔들`로부터 자유로운 적이 거의 없었다. 장기간 촬영이 진행되던 도중에는 `그 영화, 제작비를 감당하지 못해 엎어졌다`, `감독이 교체된단다` 등 별 흉흉한 소문에 휩싸였던 그는, 고고하게 편집에 몰두하고 있는 요즘에도 이런저런 소문의 주인공이 되고 있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가 `<성소>, 아직도 촬영중이라면서?’라는 이야기. 하지만 작업이 차근차근 진행되면서 그에 관한 `악성 루머`는 차츰 줄어들고 있다. 그렇다고 입방아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비교적 가볍지만 진실과는 거리가 있는 소문은 여전히 그의 주위를 떠돌고 있다.1. 장선우 감독이 편집하다 말고 절로 도망갔다?“도망은 무슨 도망. 지난해 말 열반하신 혜암 스님 영결식에 참가하기 위해 해인사에 2박3일 동안 내려갔던 건데. 사실 그분은 나의 마음의 스승이시죠. 1999년 <바리공주> 준비할 때 선방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의 장선우 감독을 둘러싼 소문과 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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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엽(62) 감독은 70년대 <내가 버린 여자>의 정소영 감독, <뻐꾸기는 밤에 우는가>의 정진우 감독과 함께 흥행 트리오를 이뤘던 인물이다. 고(故) 김기영 감독 아래에서 연출부 생활을 시작했고, 27살이던 1965년, 영일만에서 석유시추사업을 벌였던 한 젊은이의 실화를 그린 영화 <성난 아이들>로 데뷔한 뒤 지금까지 40여편을 만들었다. <명동 왈가닥>(1967), <먼데서 온 여자>(1970), <청색시대>(1976), <고교결전, 자! 지금부터야>(1977) 등 주로 코미디와 멜로영화를 번갈아 연출한 그가 이름을 알린 작품은 <꽃순이를 아시나요>(1978). 정윤희와 하명중이 출연한 이 호스티스영화는 당시 스카라극장에서 개봉, 21만6천여명의 관객을 불러모았다. 1982년 <애마부인> 시리즈를 내놓으면서 일련의 농도 짙은 멜로드라마를 연이어 선보였던 그는 1992년 <성애의
<애마부인> 감독 정인엽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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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말, 동물 최초로 에로리그에 출전하다국내 에로리그는 정규시즌에 돌입하자마자 시비에 휩싸였다. 도화선은 <애마부인>. 일부 관계자들은 “지금까지 금기시해온 동물까지 끌어다 타석에 내보내는 건 페어플레이 정신에 어긋난다”며 미등록 선수의 출전이 불법이라며 강하게 문제제기했다. 하지만 당시 KEO(Korea Erotic film Organization)는 ‘미국에도 선례가 있고, 또 지극한 동물애호로 보여지므로 별 문제가 없다’는 유권해석으로 갈무리.이어진 하반기 리그는 ‘이변’으로 시작됐다. 타선의 응집력이 약한 것으로 평가됐던 <반노>는 원미경, 마흥식 등 오랜 ‘중고 신인’ 콤비의 활약으로, <애마부인>의 거포 안소영, 임동진 두 선수가 이적해 기대를 모았던 <산딸기>를 눌렀던 것이다. 승부는 일체의 보호 장구 없이 들어섰지만 원미경이 타석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좀더 적극적으로 덤볐던 것에서 이미 <반노>쪽으로 기울었다
1982년 <애마부인>, 그리고 에로영화는 어떻게 달려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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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급습`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지난 1월 하순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하 <성소>)의 편집 작업이 이뤄지고 있는 김현 편집실을 아무런 예고도, 통보도 없이 불쑥 찾았던 사정은 이렇다. 한국영화 사상 최대 프로젝트인 <성소>의 후반작업 풍경과 장선우 감독이 짓고 있을 표정이 못 견디게 궁금했던 기자는 지난해 말, 장 감독에게 “부디 편집실을 찾아가게 해달라”는 취지의 간절한 이메일을 띄웠다. 거기엔 이미 몇 차례 <성소> 촬영장에서 장 감독과 마주쳤던 터라 흔쾌히 승낙해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도 함께 담았다.며칠 뒤 장 감독은 “… 편집실을 들키고 싶진 않네요…. 모 해둔 거도 없고…. 그렇게 대단하구 무지막지한 영화는 아닌데다가…. (편집도) 아직은 오리무중이에요. 암튼요 깊은 관심 고맙구요…. 나중에 봅시다…”라며 편집실 공개가 곤란하다는 뜻을 밝혔다. 못내 아쉬웠지만 그의 의사를 존중해 편집실 방문을 포기하려던 어
장선우 감독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편집실을 급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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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겨울 달구벌 본영에서 서울 진공을 눈앞에 둔 나를 불러 사단장이 훈시했다.“아들아! 서울 가면 두 가지를 꼭 지켜라. 첫째 식욕이 없을 때는 영양의 균형을 위해 비빔밥을 사먹어라. 둘째 사리분별이 안 되는 일을 만나면 사람 많은 줄 뒤편에 서거라.”나는 이 두 가지 주문 중 첫 번째 주문은 미심쩍었고, 두 번째 주문은 못마땅했다. 그래도 부하의 도리를 다해 첫 번째 주문만큼은 지켜야겠다고 작심하고 서울로 왔다.82년 서울의 봄은 언제나 교정에 최루탄 입자가 눈처럼 흩날렸다. 강의실은 한산했지만 학교 앞의 막걸리집은 색깔 다른 말들로 늘 소란스러웠다. 술잔이 날아가고, 병이 깨지고, 비수 같은 말들이 오가고…. 아침이면 밀주의 숙취가 머리통을 술판처럼 혼란스럽게 흔들어놓았다. 나는 아침마다 국물, 국물, 국물을 찾아야 했다. 비빔밥의 나물로 영양 불균형을 우회통과하라는 사단장의 지시는 아득해졌다. 군자금이 올라올 때 한꺼번에 몰아서 도가니탕이나 꼬리곰탕으로 정면돌파하는 전략
기억1 <애마부인>을 따라 욕망의 비빔밥을 맛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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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2월. 애마부인.1982년 2월. 거리의 길목마다 전경들이 치안유지에 힘써 도둑들이 사라지고, 정치는 안정되고, 불순한 빨갱이들은 사회에 격리되고, 깡패들은 모두 삼청교육대에서 교육을 받으며 새로운 삶을 위한 참회의 눈물을 흘리니, 흉흉하던 민심이 어느덧 안정되어, 나라님께서는 이제 우리 국민들도 즐겁게 여가를 보낼 수준에 도달했다고 판단하시어, 유교적 전통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우리 국민들에게 즐거운 오락거리를 선사하셨으니, 그것이 바로 그 이름도 아름다운 애마부인이었다. 세심하면서도 특별하게 신경을 쓰신 부분이 40여년 전에 민족의 건강한 모습을 표출코자 노력했던 독일영화와 미술의 예를 보시어 우리 민족도 접시 같은 유방의 콤플렉스를 과감히 던지도록 미사일을 닮은 유방의 주인공을 선보이게 하여 아시아의 맹주를 향한 발걸음에 자신감을 심어주셨으니 오호라 태평! 태평! 성대라.나라님의 보살핌 속에 우리는 대학입시라는 한 차례 홍역을 치르고, 졸업식을 위해 졸
기억2 고교 졸업식 예행연습날 <애마부인>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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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마부인>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을 찾아헤매다 김정미씨의 개인 홈페이지(http://user.chollian.net/~lipid7/paper)에서 발견한 단편소설을 필자의 동의를 얻어 다소 축약된 형태로 지면에 옮겼다. 필자 김정미씨는 다큐멘터리 구성작가 겸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고 있다. 편집자회사가 부도가 났다. 사주는 이미 잠적한 지 오래고 회사엔 부도 이후에 뒷수습거리가 남은 간부 사원만 며칠 출근을 하고 있었다. 오늘로 책상을 정리했다. 버릴 물건은 버리고 쓸 만한 것들을 챙기고 보니 달랑 보따리 두개다. 보자기는 결혼식 때 폐백 한복을 쌌던 그 분홍 보자기다. 아침에 나올 때 아내가 짐을 싸오라고 챙겨준 것이다. 5년 결혼생활의 후줄근함을 말해주듯 보자기는 낡았다.지하철엔 대낮인데도 사람들이 많았다. 또래의 넥타이족들을 찬찬히 바라본다. 저들도 실직을 하고 지하철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일까?서울에 살면서도 이런 데가 있었나 하는 곳에 내리고 말았다. 낯설다. 여
<애마부인> 20주년 단편소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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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는 학원에서 보는 모의고사를 망치고 과음을 했다. 술에 취한 채로 집에 들어갈 수 없어서 어디서 술을 깨고 갈까 고민하였다. 내 고민의 끝은 극장이었다. 술로 깔깔해진 입 안을 헹구기 위해 콜라라도 마시려고 매점 앞에 섰다. 매점 안은 텅 비어 있었다.극장 안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스크린에서는 당시 섹스어필의 대명사였던 남자 배우가 지적인 바람둥이 역할을 연기하고 있었다. 극장 안을 살피다 말고 잠이라도 좀 자볼까 하고 고개를 돌리는데 같은 줄에 여자가 혼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하얀 블라우스가 스크린에서 비치는 빛을 따라 울긋불긋 변하였다.매점 여자였다. 나는 그녀가 삼류극장 매점에 앉아 있긴 하지만 이런 영화는 전혀 안 볼 거라 생각해오던 터라, 그녀를 발견하곤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얼마전 극장에 왔을 때 불쾌한 마음을 먹었기 때문인지 곧 콧방귀를 흥 하고 뀌었다. 이미 잠을 잘 생각은 달아나버렸다. 나는 여자를 흘낏흘낏 곁눈질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술김에
<애마부인> 20주년 단편소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