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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의 우렁찬 목소리| 신혜은 |1995년 <낮은 목소리> | 2000년 <숨결> | 2001년 <거류> | 2002년 <밀애>| 프로듀서의 길신혜은(37) 프로듀서는 ‘변방’에서 출발했다. 충무로에서 제작과 마케팅 실무를 배워 프로듀서 크레딧을 얻은 것이 아니라 독립영화, 그것도 다큐멘터리라는 생소한 영역을 태반으로 삼은 것이다. 서부영화와 무협영화에 매혹됐던 유년 시절을 거쳐, 대학 시절 “비디오 대여점에서 VTR까지 빌려 하루 10편씩 잠 안 자고 먹어치울”정도의 광이었지만, 그는 그 과정에서 “창작에 대한 동경은 창작자에 대한 경외로 그리고 창작은 자신의 능력 밖이라는 체념으로 변했다”고 말한다. 졸업 뒤 곧바로 영화판에 덤비지 않고, 문화 관련 잡지 기자, 광고기획사 카피라이터 등을 전전하면서 생산자가 아닌 소비자로만 만족했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1991년, 변영주 감독을 만나 다큐멘터리 제작일을 시작한 건 삶의
21세기를 이끄는 차세대 여성 프로듀서 - 신혜은,심보경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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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을 팔고 싶다| 안수현 |2003년| 프로듀서의 길역사를 전공하기는 했지만 많은 80년대 학번이 그랬듯 안수현(33)씨도 “역사 자체보다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더 집중했다. 운동권으로 3학년까지 지내다 선택을 해야 할 시기가 됐다. 휴학을 하고 “도대체 뭐 하며 먹고 살아야 하나”를 화두처럼 안고 배낭여행을 떠났다. 복학해서는 취업이 아니라 졸업을 위해 밀린 학점 따기에 매달렸다. 그러다가 학교 근처에 있던 신씨네의 공채 공고를 봤다. ‘시네키드’는 아니었지만 돌이켜보니 처음으로 거짓말하고 돈을 훔쳤던 게 영화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극장에서 보고 기절할 뻔했다. 화면의 사이즈와 컬러에 압도당해서.” 그뒤로 틈만 나면 “어두컴컴하고 큰 극장에서 빛으로 영사되는 순간의 쾌감”을 찾아 극장에 드나들었다. 옆집 중학생 언니의 교복을 빌려 입고 육성회비를 입장료로 바꿔치기 하면서. 그 기억을 가지고 영화사에 들어갔는데, 영화에 대
21세기를 이끄는 차세대 여성 프로듀서 - 안수현,오은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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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명한 빛깔의 작품을 쏴라| 이선미 |2001년 <와니와 준하> | 2003년 <귀여워>| 프로듀서의 길이선미(34) 프로듀서에겐 일보 후퇴가 결과적으로는 이보 전진을 위한 밑거름이 됐다. 1996년 그가 운동 성향이 짙었던 영화제작소 청년을 나와 장선우 감독의 <나쁜 영화> 제작부에 결합한 것은 청년의 전략적 ‘투입’도 아니었고 개인적 ‘전향’도 아니었다. 단지 “재미있을 것 같아”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했고, 선배,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청년을 만든 91년 이후 정신없이 활동해온 데 따른 피로가 쌓인 것뿐이었다. “그땐 좀 지쳤던 것 같다.” 막연히 장선우 감독의 작품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연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연출부를 희망했으나 이미 자리는 꽉 차 있었다. 그래서 차선으로 선택한 제작부 일이 현재까지 이어질 줄은 당시 이선미 PD는 꿈도 꾸지 못했다.<나쁜 영화>의 시스템이 좋았던 것은 연출부와 제작부의 구분이
21세기를 이끄는 차세대 여성 프로듀서 - 이선미,이유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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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만 좇는다고 해피할까| 이유진 |2000년 <오! 수정> | 2003년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 프로듀서의 길영화계에서 동명이인을 발견하는 건 드문 일은 아니지만 이유진이라는 이름의 여성프로듀서가 둘 있다는 사실은 다소 신기하다. 여성프로듀서가 많아진 걸 입증하는 상징처럼 보인다. <오! 수정>의 프로듀서 이유진(35)씨는 96년 명보극장 기획실에서 영화 일을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영화광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대학에서 영화동아리 활동을 했고 졸업과 동시에 극장 업무를 맡게 됐다. 개관부터 프로그램 섭외까지 관련된 여러 일을 했지만 “극장이 안정되면서는 커피타는 일만 하게 돼서” 1년 뒤 극장을 나와 곧장 기획시대를 찾아갔다. 당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준비 중이던 기획시대는 월급은 극장에 비해 절반 수준에 불과했지만 비로소 영화를 하고 있다는 들뜬 느낌을 심어준 곳. “<아름다운 전태일>을 하면서 많이 배운
21세기를 이끄는 차세대 여성 프로듀서 - 이유진,현경림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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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 거장들과 함께 소생의 길로제60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현지보고베니스=백은하 lucie@hani.co.kr잠시 붙인 눈을 떴을 때, 베니스 마르코 폴로 국제공항을 향해 날아가던 파리발 경비행기 속에서는 조용한 탄식들이 흘러나왔다. 몇백 마일 상공에서 바라본 물 위의 도시는 꼬불꼬불한 수로를 따라 도시가 아니라 마치 하나의 거대한 놀이동산처럼 불을 밝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면인지 지면인지 모를 땅으로 비행기가 착륙을 하고, 검게 물든 바다 위에 띄워진 보트 위로 몸을 옮기니 잔잔해만 보이던 베니스의 파도가 얼굴을 때린다. 그러나 8월의 마지막 주, 베니스가 출렁거리는 것은 파도 때문만은 아니다. 거리에 나붙은 포스터와 휘장들, 기차역 앞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까지, 사람으로 친다면 인생의 수많은 파고를 넘겨낸 이 환갑의 영화제는 어느 때보다 성대한 잔치를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회춘의 중심, 모리츠 위원장올해로 예순개의 촛불을 밝힌 이 영화제는 파티 케이크를 자르는 첫 번째
제60회 베니스국제영화제 - 현장리포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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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 동네주민, 언론인 그리고 스타들짐 자무시의 <커피와 담배>브뤼노 뒤몽의8월27일 현지시각 저녁 7시30분, 개막식이 열리는 팔라초 델 치네마 앞은 페스티벌을 보기 위해 모여든 관광객과 자전거를 몰고 온 동네주민, ID카드를 목에 두른 언론인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올해 개막식장 앞은 붉은 카펫 대신 나무로 만들어진 ‘파도’(The wave)라고 이름 붙여진 조형물로 장식되었다. 60회 베니스영화제 역사에서 가장 거대하고 단단한 주단으로 기억될 것이 분명한 이 ‘파도’는 지난해 개막식장 앞을 나누면서 원성을 샀던 높은 연단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자리에 설치되었다. 지역 행정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알려진, 말하자면 ‘관내예술가’인 카를로 카파이에 의해 설계된 연단은 영화제 3주 전부터 대규모 공사에 들어가 개막식 아침이 돼서야 완성이 되었다. 하델른은 손님을 기다리는 동안 몇번이고 연단의 끝과 끝을 오가면서 새로운 연단을 시험했지만 정작 귀빈들은 그다
제60회 베니스국제영화제 - 현장리포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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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의 팽창보다 균형있는 수상을로카르노만의 특색 잃고 사회성 짙은 작품에 편중, 대상작은 논란 여지 남겨로카르노=글 임안자/ 해외특별기고가·사진 정한석1920년대 유럽 예술인들은 로카르노를 유토피아의 도시로 불렀다. 그리고 1947년 이곳에 영화제가 들어서면서부터 유토피아의 꿈은 영화예술과 조우하고는 오늘의 이름난 국제적 영화제로 성장해왔다. 이런 오랜 문화의 전통을 배경으로 한 제56회 로카르노영화제가 8월6일 저녁 대형 야외상영장인 피아차 그란데에서 빈센트 미넬리 감독의 1953년작 뮤지컬코미디 <더 밴드 웨건>(The Band Wagon)으로 차분히 막을 올렸다. 이날은 38도를 오르내리는 폭염에도 불구하고 7500석의 광장이 관객으로 꽉 찼고, 이곳에서 열흘 동안 매일밤 새벽 두세시까지 영화축제가 계속됐다.56회 행사의 특징을 말하자면 전에 비해 눈에 띄게 커진 프로그램과 혼란스럽도록 여러 갈래로 갈라진 부문이었다. 듣자니 2003년 영화제에 참가신청을 요구한 영
제56회 로카르노영화제 결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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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도 세상도 영화제도… 선명한 것은 없구나김기덕 감독과 동행한 정한석 기자의 로카르노 다이어리현지 팬들과 함께 포즈를 취한 김기덕(사진 맨 왼쪽) 감독.로카르노=글·사진 정한석 mapping@hani.co.kr나쁜 남자 혹은 선승과 함께8월12일, 로카르노의 여행길에 과거의 나쁜 남자, 혹은 지금의 선승을 만나다. 10여 시간을 날아가 도착한 스위스 취리히 공항에서 환승 비행편을 기다리던 중 김기덕 감독은 대뜸 영화제의 상 얘기를 꺼낸다. “영화상영만 딱 하고 바로 오면 좋죠. 하지만 사정상 그렇게 할 수는 없으니까 폐막식까지 있는 거예요. 사실, 나는 내가 영화제에서 상 못 탈 거라는 걸 알아요. 왜냐하면 영화제 심사위원들이 전문적으로 영화를 보는 비평가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취향이 다 다른 사람들이 주는 거기 때문에….” 이번 영화제 참석에 대한 사연에서부터, 지금의 사회분위기, 영화철학, 자신을 해석하는 한국 영화비평 담론에 대한 재평가, 그리고 현재 쓰고 있는 시나리
제56회 로카르노영화제 결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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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식장에서의 김기덕 감독.세태 혹은 문화8월14일, 오전 11시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공식 기자회견이 열리다. 그리고 오후 4시15분 열린 공식 상영장에서는 몇분간이나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예상대로다. 김기덕은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추상적인 ‘세태’가 아닌 정서적인 ‘문화’를 표현했고, 그것이 캐릭터와 풍경을 근거삼아 외국 기자(관객)들에 의해 한국 문화 또는 불교 문화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이런 절이 한국에는 실제로 있는가?” “불교 문화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등등. 적어도 그런 수준을 벗어난, 몇 가지 질문과 대답.당신의 이번 영화는 전작과 많이 다른 것 같다. 비유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의 전작들이 ‘클로즈업’의 영화였다면, 이번 영화는 다소 한 걸음 빠져나와 세상을 보는 ‘롱숏의 영화’이다.당신의 영화에서 ‘언어’란 어떤 의미인가. 이 영화는 나조차도 이 영화의 대상이 되는 그런 영화이다. 내 영
제56회 로카르노영화제 결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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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을 씨앗으로 시(詩)를 짓다2003 한국 호러의 ‘예술’ 도전- 절반의 성공, 혹은 시행착오에 대하여듀나 djuna01@hanmail.net<여고괴담>이 개봉된 1998년을 원년으로 잡는다면, 우린 벌써 한국 호러영화 부흥기의 5년째를 맞이하는 셈이다. 그동안 우리는 두 차례의 여름 호러영화 열풍을 맞이했다. 첫 번째는 <가위> <하피> <해변으로 가다> <찍히면 죽는다>와 같은 영화들이 무더기로 우리를 찾아왔던 2000년이고, 두 번째는 <여고괴담 세 번째 이야기: 여우계단> <장화, 홍련> <거울속으로> 과 같은 영화들이 개봉된 2003년이다.겨우 3년이 흘렀지만 그동안 한국 호러영화가 이룩한 발전은 상당하다. 2000년 호러 열풍의 결과는 소문과 작품 수를 고려해본다면 시시했다. <가위>를 제외한 나머지 영화들은 흥행에서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했고, 대부분 약간의 오컬트를 첨가한
듀나의 2003 한국 공포 에세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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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너무 의식했던아까 2003년이 한국 호러영화가 ‘예술’을 하기 시작한 해라고 했는데, 만큼 그 표현에 어울리는 영화는 없다. <장화, 홍련>이 작정하고 만든 장르 호러영화라면, 은 작정하고 만든 아트하우스 영화이다. 이수연은 김지운처럼 공포감 조성 따위에 매달릴 생각 따위는 없다. 공포를 주면 좋다. 하지만 억지로 관객을 질리게 만들 필요는 없다, 이 영화는 ‘예술영화’니까. <장화, 홍련>의 안전망이 ‘깩깩 소음’이라면 의 안전망은 ‘예술영화’의 자의식이다.호러 관객을 만족시키기 위한 무리한 시도 때문에 좋은 영화가 막판을 망쳐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런 꿋꿋한 태도는 상당히 긍정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술영화’의 자의식이 늘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 영화가 의식적으로 ‘예술영화’가 되려고 한다는 데 있다.은 이성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는 영화이다. 영화는 강한 비극적 정서를 바탕에 깔고 있
듀나의 2003 한국 공포 에세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