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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분에 달하는 길이로 공개된 김동원 감독의 <2차 송환>에서 공은주 감독이 연출자로 참여해 촬영한 시기의 영상기록은 대략 1시간50분을 차지한다. 영화 안팎의 설명을 빌리면 <2차 송환>은 공은주의 연출작으로 제작되었지만, 2006년에 연출자가 개인 사정으로 하차하고 김동원 감독이 계획하던 북한 촬영이 무산되면서 다큐멘터리의 완성은 기약 없이 지연되었다. 시간이 흘러 <2차 송환>의 작업을 재개하고 마침내 완성해낸 김동원은 작품의 균형 감각을 고려해야 한다는 생각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영화의 마지막 30여분을 제외한 모든 분량을 자신이 현장에 존재하지 않은, 그래서 연출자로서의 관점이 투과되지 않은 촬영분으로 채우고 있다. 여전히 2차 송환이 실현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어쩌면 영화를 완성하지 못할 수도 있을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김동원은 과거의 기록이 담긴 화면에서 무엇을 보았던 걸까?
직접 카메라를 들고 촬영에 임하지 않거나
[비평] ‘2차 송환’, 틈입된 목소리가 말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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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환>(2003)의 후속작은 <송환>의 조연출이었던 공은주 감독이 맡아 작업해오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중도 하차하면서 중단된 역사가 있다. <2차 송환>에는 공은주 감독이 연출하던 당시 그가 카메라 앞에서 장기수 선생들과 대화하는 모습이 삽입되어 있다. 장기수 선생을 대하는 공은주 감독의 스스럼없는 말과 태도는 ‘장기수 선생들과 작업자 이상의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는 김동원 감독의 내레이션에 힘입어 관계의 친밀함을 보여주는 한 형태처럼 보인다. 영화에서 공은주 감독은 직설적인 질문을 하거나, 때로는 김영식 선생의 말을 지적하기도 하는 등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와 같은 연출자의 모습은 김동원 감독의 영화, 나아가 제작 공동체인 푸른영상의 다른 작품에서는 드문 모습이기에 생경함을 느끼게 된다.
감독 ‘나’가 한명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푸른영상의 작품에서 감독이 카메라 앞에 적극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며 대화하는 장면은 드물다. 모
[비평] ‘2차 송환’, 멜로디는 가창자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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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가정을 해보고 싶다. 영화 <2차 송환>이 아닌, 감독 김동원의 손이 아직 닿지 않은 촬영본, 김영식 선생을 비롯한 미송환 장기수 선생들의 모습이 맥락을 알 수 없는 단편적인 이미지들로 주어진다면, 우리는 거기에서 무엇을 보게 될까.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오랜 시간 타국을 전전해야 했던 칠레 극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은 자신의 망명기를 기술한 책을, 다음과 같은 아이스킬로스의 문장을 제사로 인용하며 시작한다. “망명한 자들은 꿈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꿈은 자신의 존재가 당위를 갖는 시간과 공간을 잃어버린 자의 것이므로, 상실한 자의 꿈은 지금과는 다른 언젠가, 그리고 이곳과는 다른 어딘가를 향하기 마련이다. 강압에 의한 것이든 본인의 의지가 개입되었든, 고향을, 가족을, 이념과 자신이 갖고자 소망했던 삶의 형태까지도 상실해버린 미송환 장기수 선생들의 삶 역시 망명자의 꿈꾸기와 다를 바 없을 듯하다. 지금-여기의 세계는 그들이 꿈꿨던 (그리고 여전히, 가능
'2차 송환', 그럼에도 그들은 꿈으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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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은 그것이 아무리 생생하더라도 언제나 앞서 발생한 시간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부득이하게 회고적 성격을 지닌다. 영상에는 기본적으로 과거라는 시제가 기입되며, 그리하여 우리는 관람 행위를 통해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없던 과거를 기억해내기도 한다. 이는 영상이 재생될 때, 영상만 재생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흘러가는 과거의 표면을 바라보며 우리는 머릿속의 또 다른 회로를 작동시킨다. 단순한 문장들로 요약하기엔 무리가 따르지만, 그래서 영상을 보는 일에는 시간의 엉킴이 발생한다(라이브 스트리밍이 익숙해진 작금에 실시간 영상의 존재도 간과할 순 없지만 그마저도 관람자에게 도달하기까지 미세한 시차가 있기 마련이다).
청춘영화의 시차
근래 개봉한 두편의 영화에는 공통적으로 한 여성이 모니터 화면을 통해 다른 여성이 등장하는 영상을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하나는 <경아의 딸>이고 다른 하나는 <성적표의 김민영>이다. 인물의 이름을 나란히 제목에 포함시킨 두 영
[크리틱] ‘성적표의 김민영’의 시차가 암시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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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빈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2005)와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2012, 이하 <범죄와의 전쟁>)는 일종의 연작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만의 독특한 남성성이 탄생하고 성장하고 발현하는 양상, 남성성이라기보다 수컷성이라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할 인물의 본성이 그들만의 질서로 규범화하는 모양을 윤종빈은 성찰해왔다. 그는 늑대나 영장류 등 무리생활종(種)의 수컷 개체들에서 쉽게 관찰되는 서열과 군림의 질서, 알파 개체의 자원 점유와 권력 유지 과정에 동반하는 유무형의 폭력 양태를 장르적으로 꿰뚫곤 했다. 장기간 군사 집권기를 지낸 한국의 병영 문화가 권력기관의 규범을 형성해왔으며 이것이 수컷들의 특성으로 범벅된 조폭 문화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 또한 단단한 기본기를 갖춰 발언해왔다. 극중 남성들이 서열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표정을 관조하는 클로즈업은 누군가에겐 자성을, 어떤 이에겐 쾌감을 전했다. 주인공이 야만의
윤종빈 감독의 전작들에는 있고 '수리남'에는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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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이 유야 감독의 전작들에 대한 인상은 하나의 이미지로 기억된다. <행복한 사전>의 마지막 장면이다. 해안가에서 남녀가 서로 거리를 둔 채 서 있다. 남자는 여자를 향해 허리를 굽혀 정중히 인사하고, 여자는 웃는다. 이상하게 보이지만 두 사람이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는 방식이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허리를 굽힐 수 있을 정도의 간격은 사실 두 사람의 사랑을 지탱하는 양식인 것이다. <행복한 사전>뿐 아니라 이시이 유야의 영화에서 연인들은 늘 서로에게 거리를 두는 종족이었다.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와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에서도 연인들은 서로를 신기한 동물을 보듯이 조심스레 응시했고, 영화는 바로 그 간격 속에서 사랑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편 <우리가 말하지 않은 것>은 사랑의 관점으로 보자면 매우 범상한 영화다. 전작들과 다른 점은 간격을 사랑의 필요조건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김예솔비 평론가의 ‘우리가 말하지 않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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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블 페라라의 영화가 대부분 그렇듯이 신작 <제로스 앤 원스>는 한국에서 개봉하지 못했다. VOD 서비스로 직행한 이 영화에 대한 세간의 반응은 주된 무관심과 소수의 지독한 악평으로 채워져 있다. 해외에서도 사정은 비슷한 편인지 로카르노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지만 IMDb에 등재된 평점은 페라라 영화 가운데 가장 낮은 3.3에 불과하며 적잖은 평들이 이 영화의 터무니없는 단점들을 지적한다. 이변이 없다면 <제로스 앤 원스>는 대중은 물론 시네필에게조차 환대받지 못하고 있는 페라라의 최근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특별히 거센 불평과 비난에 시달리는 실패작으로 취급될 것이다.
기차에서 내린 제이제이(에단 호크)가 플랫폼의 노동자들을 지나쳐 로마의 텅 빈 밤거리를 걷는 도입부의 몇 장면만으로 나는 이 영화에 사로잡혔지만, 영화에 쏟아진 악평에 맞서 적극적인 반론을 펼칠 엄두는 나지 않는다. 이 영화가 장인들의 장르영화라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엉성하고 조악하기
김병규 평론가의 ‘제로스 앤 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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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에 등장하는 최악의 인간은 일단 두 명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율리에(르나트 라인제브), 다른 하나는 에이빈드(할버트 노르드룸)다. 그러나 두 사람이 최악이 되는 사정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에이빈드의 경우, 그 사정은 이 영화의 한국어 제목에 꼭 들어맞아 보인다. 그는 파티에서 율리에를 마주치고, 사랑에 빠진다. 영화의 6장(‘핀마르크 고원’)에서 쓰인 3인칭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에 따르면, 에이빈드는 사랑에 빠진 것이 애인인 수니바(마리아 그라지아 디 메오)를 배신하는 일이지만, 그래서 자신이 최악의 인간이 되어버린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노르웨이어 원제인 <Verdens verste menneske>, 즉 ‘세상에서 제일 나쁜 사람’을 뜻하는 이 말에는 사랑과 관련한 수식어가 붙지 않는다. 어쩌면 당연한 말일 테지만, 이 영화에서 보여주고자 의도한 최악의 인간은 다른 누구보다도 율리에이기
소은성 평론가의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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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히토 슈타이얼-데이터의 바다>전에서 단채널비디오 <소셜심>(2020)이 소개됐다. 이 작품에서 주목할 지점은 ‘지난 이야기’라는 말의 끊임없는 반복이다. 18분 남짓의 영상이니 ‘지난 이야기’라고 언급할 만한 내용은 사실상 없다. ‘지난 이야기’의 반복은 실체 혹은 실효성이 없는 지칭의 반복이자 일종의 챕터로 기능한다. 이는 실제 시리즈 영화를 인식하는 방식에 영감을 주었다. 시리즈 영화의 핵심은 ‘지난 이야기’를 정리하고 앞으로의 이야기를 예고하는 부록처럼 보이는 부분에 있지 않을까. 시리즈 없이 시리즈를 구축하는 <소셜심>은 시리즈 영화가 우리를 매혹하는 지점이 다름 아닌 연속된다는 환상에 있음을 가정하게 만든다. 물론 이러한 반복은 ‘루프’로 순환하는 미술관의 영사 방식과 어울려 미술관 속 영상 상영에 관한 자기 반영적 코멘트로 보이기도 했다.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공개된 요아킴 트리에의 <사랑할 땐 누구나
김소희 평론가의 챕터 혹은 디지털에서 발견한 필름의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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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놉>에 관한 해석들이 미친 듯이 쏟아지고 있다. 영향받을까봐 쳐다도 안 보고 나의 영화 체험에서 출발해 글을 썼지만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다.
두 번째 관람하기 전까지 <놉>의 마지막 장면을 OJ(대니얼 컬루야)가 살아 돌아온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나의 왜곡된 기억이 영화를 약간 다르게 접근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어 다행이었다. 영화에 OJ가 등장하는 숏(이하 ‘OJ 숏’) 다음으로 돈 되는 영상, 일명 ‘오프라 숏’이 등장한다. 그것은 폴라로이드 필름에 인화된 하늘에 떠 있는 외계 생명체의 모습(이하 ‘오프라 숏’)이다. ‘오프라 숏’이 마지막을 장식하면서 ‘OJ 숏’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영화가 ‘OJ 숏’을 다분히 사진처럼 구성하기 때문에 두숏은 비교될 수밖에 없다. ‘저 너머 먼 곳’이란 문구가 적힌 사각의 문 프레임 안에 말 ‘럭키’를 타고 서 있는 오빠 OJ의 모습은 동생 에메랄드(키키 파머)의 간절한 믿음
오진우 평론가의 <놉>, OJ는 살아 돌아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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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와 빗줄기를 뚫고 영화관을 찾았다. 스크린엔 또 다른 재난이 있었다.
얼마 전 <비상선언>을 보지 않은 지인과 이 영화에 관한 얘기를 하다 생긴 일이다. <비상선언>을 보고 세월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던 나는 다소 개략적으로 이 영화가 세월호 참사를 다루고 있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그는 이를 전혀 몰랐다는 말을 하며 다른 영화를 보겠다고 했다. 내가 말한 정보가 그의 선택에 얼마큼의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그제야 깨달은 것은 <비상선언>의 외피를 이루고 있는 어떤 요소에서도, 세월호 참사와의 연관성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분명 <비상선언>을 보며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에게 영화의 어떤 요소가 그러한 감상을 불러일으킨 것인지 설명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실제로 <비상선언>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재난
김철홍 평론가의 ‘비상선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