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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에덴을 상상하는 한 인간을 추방하려는 영화의 연약한 안간힘을 지켜본 것 같다.
숀 베이커 감독의 <레드 로켓>을 재고하는 길은 마이키(사이먼 렉스)의 경로를 그려보는 일이다. 시작은 그의 귀환이다. (스스로 말하길) 잘나가는 포르노 스타였던 그는 오랫동안 보지 않았던 부인 렉시(브리 엘로드)와 장모 릴(브렌다 데이스)의 집으로 방금 막 되돌아왔다. 숀 베이커의 영화는 이따금 다른 곳에 있던 인물(들)이 새로운 곳에 도착하면서 서사의 물꼬를 트곤 했다. <탠저린>에서 라즈믹의 처갓집 식구들이 크리스마스를 맞아 찾아오듯,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젠시가 퓨처랜드 모텔로 방을 잡아 들어오듯, 도착을 통해 하나의 갈래가 그어진다. 물론 이 도착은 정착이 아닌 기착이라 늘 잠정적이고 일시적이다. 이는 (숀 베이커가 자주 그려온) 홈리스의 삶에 있어 불가피한 상태이기도 할 터이다. <레드 로켓>의 초반부에서 마이키 또한 텍사스에 도착한다.
'레드 로켓'에서 '야생성' 혹은 '야만성'을 처리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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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희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홍상수의 영화에 관해 쓰면서 이런 경고 문구를 넣어야 하나 고민하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도 영화관의 관객이 백지상태의 얼얼함을 느껴봤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믿기 어렵겠지만, <소설가의 영화>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미처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끝을 맺는 반전(反轉) 영화다. 이때 반전이란 서사의 비밀을 뒤늦게 노출하는 방식에 관한 것일 리는 없다. 반전은 영화의 구조에서 온다고 정리할 수 있지만, 여기에는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영화는 구조 자체가 두드러지기보다 마지막에 이르러 구조를 상상하게 만든다. 그것은 퇴로가 보이지 않는 영화라는 구조다. 반전은 구조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구조가 곧 반전이다. 구조를 만든 것은 두번의 크레딧이다. 크레딧은 잠깐의 사이를 두고 두번 이어진다. 크레딧이 두번 혹은 그 이상 흐른대도 이상한 건 아니다. 옴니버스영화의 경우 개별 영화가 끝날 때마다 크레딧이 흐른다.
'소설가의 영화'에서 카리스마의 형식으로서 영화를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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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원 기자의 프런트 라인]
쓴소리를 하자면 너무 많은 영화들이 관성에 기대 습관처럼 대충 만들어지고 있다. 영화는 돈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최소한의 퀄리티와 창작자의 의도를 보장하기 위해, 자본은 중요하다. (궁핍하고 소소한) 현실을 이야기로 옮기기 위해선 실은 막대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는 걸 <파친코>를 보며 새삼 절감한다.
평범한 건 귀하고 드물다. 우리는 너무 많은 이야기에 둘러싸여 있다. 가공된 이야기 속에는 흔치 않은 사건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비범한 인물들이 시련을 뚫고 나간다. 일상의 심심한 시간들은 대체로 뇌리에 머물지 못하고 씻겨 내려가기에 마치 비어 있었던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흔하디흔한 평범함들이 다른 형식으로 표현할 땐 귀하고 비싸진다. <파친코>의 1, 2, 3, 7화를 연출한 코고나다 감독의 전작 <콜럼버스>(2017)의 오프닝에는 모더니즘 건축의 후원자였던 어윈 밀러의 저택이 나온다. 어윈 밀러는 말
'파친코'가 달성해낸 특별한 평범함을 고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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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지닌 애도와 위로의 힘이 꽤 고맙게 느껴졌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패러렐 마더스>는 주인공 야니스(페넬로페 크루스)가 고향의 집단 무덤을 발굴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마침내 발굴에 성공하는 것으로 끝나는 영화다. 그 과정 중간에 자리한 ‘뒤바뀐 아이’ 클리셰는 알모도바르식 서스펜스를 위한 장르적 장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인상을 풍긴다. 그럼에도 알모도바르는 기어이 (집단 무덤 발굴 서사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아이가 바뀐 야니스와 아나(밀레나 스밋)의 관계를 쌓아나간다. 영화는 두 어머니가 아기를 갖게 된 사연을 의도적으로 축약한 뒤 두 어머니를 마주치게 만든다. 예컨대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야니스와 아르투로(이스라엘 엘레할데)가 은막을 닮은 하얀 커튼이 나부끼는 방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꿈결처럼 지나가면, 어느새 야니스는 출산이 임박한 임신부가 되어 병실에 있다. 그곳에서 야니스는 어린 임신부
'패러렐 마더스'가 죽음을 잊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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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두고 에릭 로메르를 언급하기는 쉽다. 하지만 이 글에도 썼듯이 기원을 따지기보다 단독 작품으로 살피는 게 더욱 영화와 맥을 같이한다고 믿는다.
영화 후반부 배우이자 축제에서 바텐더 일을 하는 아고스의 딸 비올레타가 임신한 에바(잇사소 아라나)에게 아이의 아빠가 누구냐고 묻자 에바는 아빠가 없다고 말한다. 비올레타가 동정녀 마리아 같은 거냐고 되묻자 그렇다고 대답한다. 이 대화가 종지부를 찍기 조금 앞서, 에바의 입에서 임신 사실이 탄식하듯 나오면서부터 영화는 재정립되기 시작한 터다. 영화 제목이 ‘어거스트 버진’인 이유, 배경으로 기능하는 8월의 성모승천 대축일 광경, 에바가 박물관에서 임신 중 네로에게 살해당한 포파이아의 흉상을 물끄러미 보던 장면, 또 등장인물들과 나눴던 생리, 달, 육아, 임신에 관한 이야기 등도 아귀가 맞는다. 그런 점에서 아이의 아버지는 영화관 앞에서 우연히 만난, 3개월 전 헤어진 남자 친구인 듯 암시되기도 한다. 정말 그럴까. 합리적인
'어거스트 버진'이 시공간을 재창조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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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형국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우리가 진실이라 믿는 역사 속에도 목소리가 담기지 않은 사람들은 아주 많다는 사실을 마법처럼 알려주는 영화였다.
대구 경북대학교 인근 대현동 주택가에는 무슬림 유학생과 가족 약 150명이 거주하고 있다.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지에서 건너온 이들 대부분은 석박사 과정의 고학력자들이다. 기계공학 박사인 하룬 칸씨도 그중 한명이다. 한국 교수들이 ‘닥터 칸’이라고 부른다. 이슬람 교리에 따라 하루 4번 기도를 해야 한다. 기도할 장소가 마땅치 않아 사원을 짓기로 했다. 닥터 칸이 “테러리스트”란 소리를 들은 게 이때부터다. “한국은 우리에게 친절한 나라였어요. 사원 공사를 시작한 뒤부터 범죄자 집단이니 냄새가 난다느니 하는 플래카드 문구를 제 딸들이 봐야 했습니다. 정말 가슴 아파요.” 이슬람 사원을 반대하는 한국인 주민들은 동네가 슬럼화하고 범죄가 많아질 거란 이유를 내세우며 공사 진입로를 가로막았다. 1심 법원이 “공사 중지 처분은 위법”이라며
'벨파스트' 각본이 탁월한 두세 가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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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과 배신으로 가닿은 절벽 너머에도 삶이 있음을, <사랑 후의 두 여자>를 보며 깨달았다.
슬픔을 가눌 수 없다. 기도에 신이 응답할 리 없다. 신의 목소리 대신 여자에겐 이제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절벽 가까이 가면 위험하다. 하지만 백악의 절벽은 붕괴하고 회벽의 천장은 무너지는 중이다. 이것은 메리의 환상인가? 회복될 수 없는 상실 이후 고요히 그녀의 삶은 해체되고 있다.
영화 <사랑 후의 두 여자>는 영국의 신예 알림 칸의 장편 데뷔작이다. 단편 <삼형제>(2014)로 주목받은 후 BBC필름과 영국영화협회의 지원으로 제작된 영화는 영국독립영화제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을 수상했으며, 주연을 맡은 요안나 스찬란은 런던비평가협회상을 비롯한 유수의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주목받았다.
무너져내린 절벽 가까이
영국계 백인 이슬람교도 메리(무슬림 이름으로는 파히마)는 남편 아흐메드의 유품을 정리
'사랑 후의 두 여자'가 절망에서 연대로 나아가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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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에서 사람들은 21살에 죽는다. 그들은 21살에, 어쩌면 더 어린 나이에 정서적으로 죽는다.” - 존 카사베츠, [The Films of John Cassavetes: Pragmatism, Modernism, and the Movies]
1. <리코리쉬 피자>, ‘홈 무비’의 소실
1970년생인 폴 토마스 앤더슨은 <리코리쉬 피자>에서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1973년의 산 페르난도 밸리로 되돌아간다. 그의 아홉 번째 장편영화는 10대 소년과 스물다섯 살의 성인 여성이 커플로 결합하는 70년대의 이야기를 다룬다. 유년기의 흔적에 관한 개인적 기록이 반영된 배경일 테고, 영화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균질한 스튜디오 시스템이 붕괴하고 60년대를 관통하던 정치적 이상이 사라진 뒤의 시기다. 텔레비전에서는 전쟁을 알리는 뉴스와 소비상품을 광고하는 문구가 동시에 송출되고, 포르노그래피와 약물이 주류 문화에 침범하던 때다. 폴 토마스 앤더슨이 다시 한번
'리코리쉬 피자' '더 배트맨', 미국영화에 새겨진 70년대의 흔적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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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나자마자 벌떡 일어나 극장 출구를 향해 나가는 다른 관객들을 보면서 저이들은 어떻게 저런 힘이 남아 있나 싶었다. 그것이 질문의 시작이었다.
<레벤느망>을 처음 본 날 탈진하고야 말았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몸이 축나버린 느낌이 들었다. 한 인물이 겪는 육체적 경험을 스크린 밖에서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다니. 극장을 나온 이후로도 한참 동안 손끝이 떨렸고, 이 영화를 반복해 본다 해도 두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감각이 그 손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는 듯했다. 영화를 관람하던 어느 순간부터 주먹을 너무 꽉 쥐었던 탓일 테다. 언제부터 몸이 긴장하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으나, 주인공 안(안나마리아 바르토로메이)이 임신 중단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으로 뜨개질 바늘을 몸 안으로 넣으려는 때, 객석의 여기저기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새어나올 때, 나 또한 꼭 쥐고 있었던 주먹을 요란스럽게 떨며 안의 육체가 전하는 전압을 견뎌보려 했으니 말이다.
단어와
'레벤느망'의 몰입도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저항하고 싶은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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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희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실존 인물을 연기한 배우의 연기에 대한 찬사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스펜서>에서 다이애나를 연기한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연기는 새삼 이런 질문을 불러온다.
“Where am I?” 홀로 운전대를 잡고 지도를 보며 길을 찾던 다이애나(크리스틴 스튜어트)는 한 식당에 들어가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질문한다. ‘여기가 어딘가요?’ 정도로 번역될 수 있지만, 이번만큼은 ‘내가 어디에 있나요?’라고 직역하는 것이 옳다. 이 질문은 현 상태에 관한 자조적인 읊조림만이 아니라, 다이애나 자신의 삶에 대한 총체적인 물음이기 때문이다. 다이애나는 왕세자비로서의 삶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기보다 끊임없이 흔들리는 인물이다. 그렇게 볼 때 이 질문은 나약함의 표현이 아니라 영국 왕실 패밀리로서의 삶에 더는 머물 수 없다는 철저한 각성의 표현이다. 한편 이 질문은 영화를 보는 관객을 은밀히 초대하는 말이다. 늘 무리와 떨어진 채 왕실로부터 거리를
'스펜서' 실존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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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심판>의 판사는 기록 뒤에 숨겨진 진실을 위해 현장을 뛰어다닌다. 이는 분명 사법부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훼손하는 월권 행위이지만, 그 속에서 <소년심판>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다.
<소년심판>의 홍보 문구이자 주인공의 대사, “저는 소년범을 혐오합니다”는 명백히 관객에 대한 도발이다. 사전 홍보만 보면 해당 대사가 마치 심은석(김혜수)이라는 인물을 대변하는 것 같지만, 실제 그가 보여주는 행동은 소년범 혐오와는 거리가 멀다. 곧 자세히 보겠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소년범이 저지른 행동의 진실을 밝혀내고 그들을 교화하기 위해 최선의 처분을 고민하는, 차라리 ‘소년범을 사랑하는 판사’에 더 가깝다. 이렇게 <소년심판>측은 실제 인물과 맞지 않는 자극적인 대사로 드라마를 홍보했지만 그것을 넷플릭스 재생 건수를 올리기 위한 상술이라고만 하면 불공평하리라. 소년범을 혐오한다는 대사는 단순한 홍보 외에도 또 한 가지 중
'소년심판'이 지적한 사법제도의 모순과 한계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