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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원 기자의 프런트 라인]
마음에 낀 굳은살을 발견할 때마다 나이가 들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감정 표현에 인색해지고 경직된 표정이 어느새 기본값이 되어버렸다.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보며 오랜만에 나이테 같은 굳은살을 조금 깎아냈다. 가끔은 쓰면서 행복해지는 글을 쓰고 싶다. 기왕이면 읽을 때 행복해지는 글이라면 더 좋겠다.
타임머신을 타고 갑자기 미래에 떨어진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익숙했던 모든 것들이 몸에서 떨어져나와 낯설게 겉도는 감각. 내 마음과 생각은 어린 시절 그대로인데 주변만 너무 빠르게 변해버렸다는 자각과 함께, 비로소 나이를 먹었다는 걸 실감한다. 어른이 된다는 건 책임져야 할 것들이 늘어간다는 의미다. 각자 주어진 사회적 위치에 따라 요구되는 규범들이 있다. 본래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외투가 한겹씩 더해질 때마다 마음도 함께 늙어간다. 당연하게 감당했던 무게에 짓눌려 한없이 가라앉는 기분. 침대에 파묻혀 가라앉는 것이 축 처진 내 몸인지,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복고를 활용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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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거듭 관람해도 등장인물들이 시침 떼고 식자재 거래를 마치 약물 거래 대하듯 하는 태도에 혀를 내두르는 건 변함이 없었다. 여기서 비롯한 심리적 반동은 이 영화가 무협이라는 판단으로까지 나아갔다.
사전정보 없이 영화를 본 덕(?)에 3막으로 이뤄진 작품에서 2막이 다 지나갈 때까지 이야기가 나아가는 길을 확신하지 못했다. 요리와 식재료를 소재로 한 작품은 아닐 것이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요리 분야에 무지한 탓에 그때까지 트러플을 마약의 원료 정도로 짐작했다. 괴한들이 트러플 돼지를 훔치기 위해 폭력을 동원하고, 롭(니콜라스 케이지)이 돼지를 되찾으려고 떠난 여정에서 파이트클럽을 방문하거나 모두가 쉬쉬하는 인물에게 다가가는 선택을 하는 일들을 근거로 누아르와 범죄 스릴러의 향취가 묻어나는 액션을 기대했던 것도 같다. 관객 사이에도 <존 윅>(2014) 같은 작품을 언급하는 것을 보니 혼자만의 오인은 아닌 듯했다. 아니, 이러한 오인은 분명 의도된 면이
'피그'가 그리는 요리 무협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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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규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김기영의 <양산도>(1955)의 유실된 마지막 장면에는 무덤이 갈라지고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두 주인공이 승천하는 모습이 묘사된다고 한다. 우연의 일치지만, 그렇게 무덤은 기록되지 않고 사라져버린 영화의 표상과 연관을 맺는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이름 없는 무덤의 옆자리에 또 다른 영화적 무덤을 세우는 기획처럼 느껴진다. 삶의 심지를 불태우는 강렬한 무덤이 스크린에 세워진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무덤의 영화다. 김상현 성우의 목소리가 안내하는 도입부의 끝자락에서 관객은 펜스에 가로막혀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무덤과 ‘꽃분이’라고 적힌 비석을 마주한다. 낫을 든 남자가 다가와 무덤 주변의 잡초를 정리하는데, 그가 누구이고 무덤의 주인과 어떤 관계인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 무덤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구체적인 연고가 밝혀지지 않는 데다 그 자체로는 특별한 위상을 차지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 익명의 무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이야기가 되지 못한 이야기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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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세컨드>를 ‘장이머우의 <시네마 천국>’쯤으로 생각한다면 아쉬운 일이다. 오랜 시간 필름으로 작업해온 장이머우가 필름과 영화를 소재로 작품을 만든 이유를 생각해봤다.
오지 혹은 고립된 공간에 대한 장이머우 감독의 관심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는 공간 속에 운명처럼 갇힌 인간에게 극단의 정서를 입혀놓는다. 그들은 고립돼 외로운 존재이면서 동시에 건강하고 질기다. 장이머우의 카메라는 오지의 정서를 깊이 있게 표현해내기로 유명한데,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랜 지점은 그가 카메라맨으로 참여한 천카이거의 <황토지>(1984)다. 영화의 엔딩에서 황하의 누런 격류가 도저하게 흐른다. 격류는 (믿음을 저버린) 팔로군 병사에 대한 그리움을 하얗게 태운 시골 소녀의 슬픔을 대신 품는다. 다시 오지로 카메라를 들이댄 <원 세컨드>의 주인공은 정치·사회적인 이유로 오지의 삶에 내몰린 자들이다. 문화대혁명 시기를 다루는 태도는 별반다르지 않지만,
'원 세컨드', 필름의 의미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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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희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관계의 내용으로 본다면 희박해 보이지만, 사랑이라는 인식을 가능케 한 것들에 관해 생각했다.
<리코리쉬 피자>의 오프닝숏은 거울 이미지다. 거울에 비친 이미지는 그 자체로 특별하다고 할 수 없으나, 오프닝숏에서 인물이 내내 거울 속에서만 등장하는 것은 예사롭지 않다. 앨범 촬영을 앞두고 학교 화장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매만지며 단장하는 개리(쿠퍼 호프먼)와 친구들이 보이는데, 카메라는 아이들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위치에서 거울 속 이미지만을 보여줄 뿐, 그 뒤에 놓인 실제의 몸은 철저히 배제한다. 누군가의 장난으로 바닥에서 물이 마구 솟구치는 사고가 일어나면서 아이들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도 아이들의 실제 몸은 카메라 위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소년들이 특정 조건에서만 보이는 신기루나 유령일 수 있다는 과장된 상상을 하게 된다. 그들이 마침내 거울 오른편으로 비치는 문 뒤로 사라질 때, 그들은 마치 거울 속으로 들어가버린
'리코리쉬 피자' 속 사물과 시청각적 사랑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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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고 신선한 배우들이 대거 등장하는 작품과의 만남은 분명 반가운 경험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학교는>은 그 즐거움을 오래 이어가지 못한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 학교는>(이하 <지우학>)의 4부쯤을 보며 생각했다. ‘꼭 12부작이어야 했을까?’ 그 후 같은 의문이 수차례 떠올랐다. ‘진정 12부작이어야만 했나?’ 그리고 11부가 끝나는 순간 외칠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한 시간이나 남았다고?” 물론 60분물 16부작 ‘미니시리즈’에 단련된 한국인에게 709분의 러닝타임이 절대적으로 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우학>은 질주하는 좀비 떼의 속도와 별도로 엔딩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 유독 강한 인내심이 필요한 시리즈다. <씨네21> 송경원 기자는 1342호에서 “이 빤한 시리즈의 속도는 약간 이상하다”라고 지적하며 “의도와 달리 전체적으로는 그렇게 빠르다는 인상을 받지 못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에피소드들이
시리즈 '지금 우리 학교는'이 원작 웹툰에서 버리고 취한 것들이 만든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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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형국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영화란 현실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완성되는 것임을 뚜렷이 보여준 사례라고 보았다.
<킹메이커>에는 좀처럼 떼어내기 어려운 두 가지가 들러붙어 있다. 첫째, 대선 국면이라는 개봉 시기 탓에 어쩔 수 없이 작품에 얹히는 관객의 심상. 둘째, 인물 설정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화면에 붙여놓은 기호로서의 빛과 그림자. 전자는 제작진의 본의와 다르게 빚어진 사회적 현상이고 후자는 감독이 공들여 의도한 것이지만, 공히 영화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 글은 전자에 대한 긴 감상과 후자에 대한 짧은 언급이자, 영화 비평이라기보다 사회 비평에 가까운 소견이다.
역대 유례를 찾기 힘든 ‘비호감 대선’의 와중에 <킹메이커>를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 영화가 애초 계획대로 2020년에 개봉했다면 어땠을까. 2010년대 종반부에 시나리오가 쓰였고 2년 전 촬영을 마친 이후로도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수차례 개봉이 미뤄진
'킹메이커'를 보며 지금의 한국 민주주의를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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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의 ‘비극’이 무엇일까 궁금해하다 실로 가까운 곳에서 그 비극을 보았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또다시 스크린으로 옮겨진다 해도 우리는 더이상 놀라지 않는다. 그의 희곡들은 스크린 위를 끈질기게 파고들었고, <맥베스> 또한 수차례 영화화되었다. 그중에는 오손 웰스, 로만 폴란스키, 구로사와 아키라 같은 진지한 거장들의 작품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기에 조엘 코엔이 이 유명한 비극을 다시 영화로 만들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왜’와 ‘어떻게’라는 질문이 동시에 떠올랐다. 저 거장들 못지않게 양식적인 작품을 만들어왔지만, 그들과는 달리 빼어난 유머 감각을 지니고 있는 코엔 형제의 형 조엘이 과연 어떤 모습의 비극을 완성해냈을지 궁금했던 것이다.
사실 코엔 형제가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 장르영화의 문법만큼이나 문학작품들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건 널리 알려져 있다. 형제는 제임스 M. 케인과 레이먼드 챈들러
'맥베스의 비극' 조엘 코엔이 만들어낸 비극의 모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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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원 기자의 프런트 라인]
보자마자 ‘이건 먹힌다’라고 생각했다. <지금 우리 학교는>은 아마도 넷플릭스 시청자들의 관심을 손쉽게 사로잡을 것이다. <부산행> <킹덤>에서 이어진 K좀비 불패 신화를 쓸지도 모르겠다. 물론 (<오징어 게임>이 그랬듯) 흥행과 작품성, 완성도는 대부분 별개의 그래프를 그린다. <지금 우리 학교는>은 개별 작품으로서보다는 하나의 현상으로서 훨씬 흥미롭고 유효하다. K좀비는 어떻게 세계를 정복했나. 현상과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길 기대한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제목만 보고 깜박 속았다. <지금 우리 학교는>(이하 <지우학>)은 당연히 학교를 무대로 벌어지는 좀비물일 거라 생각했다. 절반만 맞는 이야기다. <지우학>에선 학교 바깥 이야기도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학생들이 편으로 뭉쳐 탈출을 도모하는 사이 바깥에선 자식들을 걱정하는 부모들의 이
'지금 우리 학교는', 장르와 정점과 패턴의 함정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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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어떤 틈새들을 생각하며 ‘구찌’가 걸린 아이러니의 덫은 무엇일까 곱씹어보았다.
<하우스 오브 구찌>에는 톰 포드가 등장한다. 당시 톰 포드는 구찌가 낡고 한물간 브랜드로 쇠락해갈 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아 반등의 기회를 마련하면서 스스로도 유능한 디자이너로 인정받았고, 영화에도 이에 관한 일화가 삽입된다. 사실 포드 개인에 관한 서사는 그다지 많이 할애되지 않아 그저 소소한 에피소드쯤으로 그치는 듯한 인상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의 존재가 패션에 다문한 관객층을 위해 새겨진 이스터 에그 정도로만 기능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달리 말하자면 (관객 개개의 배경과 맥락에 따라 정보의 입지가 달라진다는 엄연한 사실 위에서) 파트리치아나 마우리치오, 알도, 파올로의 이름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조금 생소하다. 영화에서도 그렇지만 그들의 이름이 ‘이름’ 이상으로 받아들여질 때는 성(姓) 구치를 함께 언급할 때이며 심지어 그럴 때조차 그들의 존재감은 브랜드 구찌라는 네
'하우스 오브 구찌', 구치는 어떻게 구찌에서 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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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이항의 대립 관계에 관한 영화다. 스필버그는 인종과 인종, 토착민과 이민자, 가진 자와 없는 자, 힘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관계를 단순한 대결 구도로 재현할 마음이 없다.
뛰어난 예술 작품은 또 다른 창작의 토양이 된다. 무대에서 위대한 뮤지컬의 여정을 밟아온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도 마찬가지다. 아서 로렌츠의 책에 제롬 로빈스와 레너드 번스타인, 그리고 젊은 시절의 스티븐 손드하임이 가세한 뮤지컬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영화의 옷을 입는다. 어니스트 리먼이 작가로 참여한 영화 버전이 거둔 성공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뮤지컬과 별개로 1960년대부터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교향적 무곡>을 수차례 녹음했던 번스타인은 1984년에 키리 테 카나와와 호세 카레라스 등을 불러들여 스튜디오 버전의 2장짜리 음반을 만들었다. 어떤 관객은 그 음반이 사운드트랙인 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더 개성 넘치는 변화를 가져온 음반은 앙
스티븐 스필버그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