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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고나다의 <애프터 양> 첫 장면에는 두 가지 종류의 촬영이 제시된다. 네 가족의 평화로운 한때를 오래된 필름카메라에 담아내는 아날로그적인 사진 촬영이 전면에 드러나 있고, 테크노 안드로이드인 양(저스틴 H. 민)의 시선을 통해 실시간으로 기록되는 비밀스러운 촬영이 다른 한편에 숨겨져 있다. 뒤늦게 알려지는 사실이지만, 안드로이드는 날마다 몇초씩 녹화할 수 있는 기능을 지니고 있으며 렌즈(눈)에 찍힌 기록은 기계 중심부 기억 장치에 영원히 저장된다. 양이 고장을 일으키고 더이상 작동하지 않자 제이크(콜린 패럴)는 양의 기억 장치를 추출해 기록된 영상을 보게 된다. 제이크는 크리스 마르케의 <환송대>에서 묘사되는 시간 여행자처럼 두눈에 디스플레이 장치를 부착하고 눈앞에 떠오르는 비인격적 이미지를 바라본다. 두눈이 가려진 그의 시선 앞으로, 기억 장치에 새겨진 수집가의 기록이 무작위로 펼쳐진다.
<h3>영화를 움직이게 하는 것
카메라 렌즈는 인간
김병규 평론가의 영화적 고정 장치에 관한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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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 집착적으로 몰두하는 캐릭터, 긴박한 호흡까지 스포츠영화에서 기대되는 전형들이 여기 다 있다. 그러나 무언가가 이상하다. 일단 조정 경기의 몸짓을 따라가보자.
0. 달라붙은 영화들
달라붙은 영화들이 있다.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일어난 상황엔 눈독 들이지 않고 인물에게 밀착되어 그가 체험하는 지금에만 오롯이 집중하는 영화들. 몇년 전만 해도 이를 ‘나’ 중심의 영화라 곧장 호명했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다. 개인의 드러냄을 강조할 필요가 없게 된 요즈음 ‘나’라는 호명은 원래의 효력을 잃었다. 나의 드러냄은 익숙하고 빈번하다. 개인 SNS를 통해 다른 자아를 만드는 일쯤은 거창한 예술을 통과하지 않고도 가능한 일상이 되었다. 자기계발서를 읽으며 ‘일상 예술화 전략’을 꿈꾸던 순진한 시기는 예술이 일상이 된 시대에 삼켜졌다. 극단적으로 제한된 비전에 몰두하는 영화들은 오늘날 보이는 것이 포화상태에 이르렀음에 대한 하나의 반응처럼 보인다. 오늘날 이미지가 당면한 문제는
김소희 평론가의 '더 노비스', 분열적 일인칭 영화가 해체한 시점숏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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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 다큐멘터리 장르에서 나무라는 빈틈을 찾아낸 것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한국의 재개발 다큐멘터리는 그동안 무엇을 담아왔을까? 재개발 지역으로 선포되고 자신의 터전을 잃은 주민들의 상실감과 주거권을 위한 투쟁의 장을 먼저 담아내왔다. 그런데도 그곳에 가장 먼저 지워지는 존재는 사람이었다. 재개발 지역은 건물 벽면에 스프레이로 적힌 단어대로 ‘공가’가 된다. 카메라는 아직 떠나지 못한 존재들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쉽게 떠나지 못하는 영역성 동물인 고양이가 주인공으로 부상했다. 움직이지 않는 사물에도 관심을 보였다. 아파트 내부나 곧 철거될 건물의 불안감을 담아내는 재치도 보였다. 그러는 와중에 감독의 모습도 다양해졌다. 한때 감독은 주민들과 함께 투쟁하는 카메라를 든 액티비스트의 면모를 보였다. 그러다 어느새 카메라 앞에서 뒤로 물러나며 최근엔 비인칭적인 시선으로 재개발 지역을 담아내며 현대미술 작가처럼 보이기도 했다.
영화 제목은 비워뒀다. 수많은 영화가 스쳐 지나갔
오진우 평론가의 '봉명주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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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리듬이 좋고, 대사가 좋은 영화다. 짧고 일상적인 문장이 리듬을 형성한다. 영화 전체가 마치 하나의 음악 같다.
누군가 ‘러브 게임’이라 불러도 상관없을 정도로 <파리, 13구>의 인물들은 소란스럽다. 에밀리(루시 장), 카미유(마키타 삼바), 노라(노에미 메를랑), 세 사람의 모습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삼각관계’와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친구’나 ‘연인’이란 표현도 어울리지 않는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에밀리는 “장례식에 참석하면 우린 사귀는 거야”라고 말하는데, 이 말의 효력도 믿을 수 없다. 실상 영화 속의 인물들과 ‘약속’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노라와 앰버 스위트(카미유 베토미에)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잘 지낼 수 있을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이 후자의 커플은 ‘한동안은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싶게 만든다. 참으로 이상한 상상이다. 긍정의 대사를 듣고 파탄을 수긍하게 되고, 육체가 쓰러지는 추락의 장면을 보고 행복을
이지현 평론가의 '파리, 13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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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국제영화제에서 4K 리마스터링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큐어>를 관람했다. 다음날 서울에서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를 봤다. 문득 어떻게 하면 제대로 미칠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영화는 인연이다. 어떻게, 어떤 방법과 순서로 만나느냐에 따라 서로 대화를 시작한다.
대혼란은 없었다.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이하 <닥터 스트레인지2>)는 생각보다 길었고 예고편에서 겁을 준 것보다 훨씬 평이했다. (매우 주관적인 감각이지만) 상영시간이 꽤 길다고 느껴지는 건 현란한 화면과 무관하게 지루하게 늘어지는 부분이 있다는 증거다. 어딘가에서 리듬이 무너졌거나 지나치게 설명이 길어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끝난 후 각종 상징을 해석하기 위해 달려들 수밖에 없는 영화(예를 들면 나홍진 감독의 <곡성> 같은)나 플롯을 다시 배열해가며 정리가 필요한 영화(예컨대 크리스토퍼 놀란의 작품들)에 비해 <닥터 스트레
송경원 기자의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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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도식성이 아니라 그를 통해 표현되는 삶의 무게와 다양성이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생방송 5분 전, 방송국 간판 앵커 세라(천우희)는 누군가가 자신을 죽이려 하고 있다는 제보 전화를 받는다. 장난전화로 여기고 무시하려 했지만 찜찜함을 거둘 수 없었던 세라는 이것이 너에겐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엄마 소정의 말을 듣고 제보자의 집으로 간다. 그리고 제보자와 어린 딸의 시체를 발견한다.
이 정도면 정지연 감독의 <앵커>가 하려는 이야기의 방향성이 그려진다. 살인사건의 진상을 추적하는 추리물이 될 것이고, 아나운서뿐만 아니라 기자로도 인정받으려는 세라의 야심은 오히려 이 추적에 방해가 될 것이고, 범인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을 것이고, 클라이맥스는 방송국의 생방송 현장에서 벌어질 것이다.
실제로 영화에서 이 모든 일들은 일어난다. 단지 우리가 예상했던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영화의 예고편이 나오는 순간부터 허물어진다
듀나 평론가의 '앵커', 우린 아직 이 이야기에 지칠 권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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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형국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최근 학교 폭력 콘텐츠들에서 어떤 경향이 엿보인다. 약속을 어기는 법을 가르치는 어른들이 괴물을 키우며 또한 소비하고 있다.
서울 목동에서 법률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 문성윤 변호사는 경력 20년의 형사법 전문변호사다. 그간 상당수의 소년범 사건을 맡아왔다. 한번은 ‘10호’ 처분(소년원 2년 이내 송치)이 충분히 예상되는 사건을 수임한 적이 있다. 힘껏 변호해 ‘8호’ 처분(소년원 1개월)을 이끌어냈다. 처분받은 소년이 법정 문을 나서기 무섭게 내뱉은 말은 이랬다. “오 예! 8호!” 소년의 쾌재에는 일말의 반성도 들어 있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피해자가 겪고 있을 고통은 말할 것 없고 선처를 호소하며 써내려간 반성문 한줄까지 모두를 없던 일로 만들어버리는 듯했다. 문 변호사는 생각했다. ‘이건 실패한 변론이다.’
“깨닫는 처분이 아니라 원하는 처분을 받게 했으니 잘못한 변론이죠. 소년범을 대하는 변호사는 당사자가 좋아할 처분을 받게
송형국 평론가의 한국 드라마·영화에 범죄 소년이 잇따라 출현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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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포착하는 진정한 공포의 실체에 가까워지기 위해 글을 썼다.
<쓰리: 아직 끝나지 않았다>에서 가장 강렬한 순간은 오프닝부터 이어지는 일련의 장면들이다. 참혹한 살인이 벌어지는 현장. 한 소녀가 겁에 질린 채 그 광경을 훔쳐보고 있다. 살인을 마친 살인마는 유유히 희생자의 집 밖으로 빠져나와 담배를 피운다. 바로 그 순간 실수로 인기척을 낸 소녀. 소리를 감지한 살인마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 희생자의 집 문을 두드린다. 짐짓 정체를 숨긴 채. “문 열어. 경찰이다.” 장면이 전환되면, 신입 수사관 셰르(아스카르 일리아소브)가 경찰서에 첫 출근한다. 그가 선배 경찰들에게 꾸벅 인사한다. “수습으로 일하게 된 셰르입니다.”
이 인상적인 장면에서 ‘경찰’은 살인마가 새로운 희생자를 찾기 위해 꺼내든 미끼이자, 셰르가 조심스레 소개하는 자신의 정체성이다. 이때 경찰이라는 단어는 살인마와 신입 수사관 사이를 단숨에 관통하며 그들을 하나로 연결짓는다. 그러나 이 연결
'쓰리: 아직 끝나지 않았다'에 담긴 공포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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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하고 친근하고 쓸쓸한 감정들이 공존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이 영화에 복잡한 심경을 안고서 무언가라도 뱉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왜 이토록 <소설가의 영화>가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이렇게 편안하게 보아도 되는 걸까. 분명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극장을 나온 길수(김민희)가 홀로 복도를 서성일 때,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모습을 감출 때에, 마치 영화가 아스라이 사라져가는 것 같아 말할 수 없이 쓸쓸해졌는데도, 어째서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친근함과 편안함이 충만하게 보존되고 있는 것일까. 이는 질문이기보다는 영화를 보고 나오며 떠올린 즉각적인 감상에 가까웠다. <소설가의 영화>는 홍상수의 세계를 줄곧 좇아온 관객에게 넌지시 대화를 걸어오는 영화처럼 느껴진다. 전작들과 새로운 영화를 비교하며 그 세계의 변화를 느껴보려는 관객, 그와 함께 나이 들어간다는 걸 인식하거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삶의 변화를 체감하거나 감지하게
'소설가의 영화'가 친근하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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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에덴을 상상하는 한 인간을 추방하려는 영화의 연약한 안간힘을 지켜본 것 같다.
숀 베이커 감독의 <레드 로켓>을 재고하는 길은 마이키(사이먼 렉스)의 경로를 그려보는 일이다. 시작은 그의 귀환이다. (스스로 말하길) 잘나가는 포르노 스타였던 그는 오랫동안 보지 않았던 부인 렉시(브리 엘로드)와 장모 릴(브렌다 데이스)의 집으로 방금 막 되돌아왔다. 숀 베이커의 영화는 이따금 다른 곳에 있던 인물(들)이 새로운 곳에 도착하면서 서사의 물꼬를 트곤 했다. <탠저린>에서 라즈믹의 처갓집 식구들이 크리스마스를 맞아 찾아오듯,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젠시가 퓨처랜드 모텔로 방을 잡아 들어오듯, 도착을 통해 하나의 갈래가 그어진다. 물론 이 도착은 정착이 아닌 기착이라 늘 잠정적이고 일시적이다. 이는 (숀 베이커가 자주 그려온) 홈리스의 삶에 있어 불가피한 상태이기도 할 터이다. <레드 로켓>의 초반부에서 마이키 또한 텍사스에 도착한다.
'레드 로켓'에서 '야생성' 혹은 '야만성'을 처리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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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희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홍상수의 영화에 관해 쓰면서 이런 경고 문구를 넣어야 하나 고민하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도 영화관의 관객이 백지상태의 얼얼함을 느껴봤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믿기 어렵겠지만, <소설가의 영화>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미처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끝을 맺는 반전(反轉) 영화다. 이때 반전이란 서사의 비밀을 뒤늦게 노출하는 방식에 관한 것일 리는 없다. 반전은 영화의 구조에서 온다고 정리할 수 있지만, 여기에는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영화는 구조 자체가 두드러지기보다 마지막에 이르러 구조를 상상하게 만든다. 그것은 퇴로가 보이지 않는 영화라는 구조다. 반전은 구조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구조가 곧 반전이다. 구조를 만든 것은 두번의 크레딧이다. 크레딧은 잠깐의 사이를 두고 두번 이어진다. 크레딧이 두번 혹은 그 이상 흐른대도 이상한 건 아니다. 옴니버스영화의 경우 개별 영화가 끝날 때마다 크레딧이 흐른다.
'소설가의 영화'에서 카리스마의 형식으로서 영화를 생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