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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영화인들⑧] 아름다운 생존, 한국 여성 영화감독 30인 - 박남옥부터 윤가은까지
김소미 사진 씨네21 사진팀 2018-10-03

미래가 여기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9월 28일부터 12월 5일까지 <아름다운 생존: 한국여성영화감독 박남옥·홍은원·최은희·황혜미·이미례·임순례> 전시가 열린다. <씨네21>도 공동주최로 참여해 한국영화사에 가장 중요한 챕터이나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루어졌던 여성영화인들, 특히 감독들에 초점을 맞추어 그들의 영화에 대한 집념과 지난한 분투 과정을 살펴보려 한다. 이어서 1990년대 후반 잇따라 등장한 변영주, 이정향, 홍형숙 감독부터 2010년대 독립영화의 새로운 저력을 확인시킨 윤가은 감독, 90년대 출생 감독의 존재를 알린 정가영 감독 등 지난 20여년간 한국영화계를 끊임없이 긴장하게 만들었던 총 24인의 여성감독을 정리해봤다. 최근일수록 새롭게 등장하는 여성감독의 수가 많아 지면에 다 싣지 못했다. 이 아쉬우면서도 기쁜 고민이 앞으로 지속되길 바란다.

이정향 1964~

이정향 감독.

대기업 자본이 유입되면서 활로가 트이던 90년대 충무로에서 이정향 감독은 <비처럼 음악처럼>(1992), <천재선언>(1995)의 조연출을 거치며 여성 영화인으로서 입지를 다졌다. 심은하, 이성재가 주연한 데뷔작 <미술관 옆 동물원>(1998)은 시나리오 단계부터 탄탄한 완성도를 인정받으며 준비된 신인의 탄생을 증명한 영화. 개인주의적 생활양식을 추구하면서도 소통과 교류의 가능성에 목마른 90년대 남녀의 로맨스를 유쾌하고 세련된 감수성으로 담아 청룡영화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춘사영화제 등 그해 신인감독상을 휩쓸었다. 이정향의 이름은 2002년 <집으로…>에서 한층 공고해진다. 포스터에 노인과 어린아이가 나란히 서 있는 영화가 409만 관객을 동원한 유의미한 이력은 아직 한국영화에서 새롭게 대체된 바가 없다. 미국 콜럼바인 총기난사사건에서 가해자를 용서한 학생들에 대한 칼럼을 읽고 영감을 얻은 영화 <오늘>(2011)은 화려한 관심을 벗어던지고 9년 만에 복귀를 선언한 작품이다. 어느덧 7년이 지난 지금, 이정향 감독은 지난 20년간 내놓은 단 세편의 영화만으로 여전히 ‘이정향 영화’를 기다리게 만든다.

홍형숙 1962~

홍형숙 감독.

홍형숙 감독은 1980년대 중·후반부터 독립영화 현장에서 다큐멘터리스트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영화 안팎에서 산업계의 정책 현안을 주시하고, 제도 개선에 목소리를 냈다. 한국독립영화협회 이사를 역임했고, 2018년 제10회 DMZ국제다큐영화제의 새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한국 독립영화의 주요한 근거지 중 하나인 ‘서울영상집단’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홍형숙 감독은 소규모 학교를 통폐합하는 정책에 저항하는 두밀리 분교의 투쟁을 담은 다큐멘터리 <두밀리: 새로운 학교가 열린다>(1995)로 데뷔했다. 간첩 혐의로 조국에 귀향할 수 없었던 재독 철학자 송두율 교수를 조명한 <경계도시>(2002) 시리즈, 서울의 주거 형태에 대안을 제시한 성미산 마을을 소개하는 <춤추는 숲>(2012) 등 한국 사회의 화두를 스크린 위로 옮기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제35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경계도시2>(2009)로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다.

변영주 1966~

변영주 감독.

한국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극장 개봉한 다큐멘터리는? 정답은 변영주 감독의 장편다큐멘터리 데뷔작 <낮은 목소리: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1995)이다. 여성영화집단 ‘바리터’, 다큐공동체 ‘푸른영상’을 거치며 제주도 매춘 여성들에 관한 다큐멘터리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1993)을 발표한 적 있던 변영주 감독이 그 관심을 확장해 나눔의 집을 중심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과 역사의 조각을 모았다. 90년대에 <낮은 목소리> 시리즈를 3편까지 완성시킨 변영주 감독은 첫장편 극영화 <밀애>(2002)를 발표하며 30대 여성의 욕망과 판타지를 불온한 로맨스 서사 위에 펼쳐냈다. 탈주, 그리고 자유에 대한 변영주 감독의 본능은 씩씩한 청춘영화 <발레교습소>(2004)를 거쳐 범죄 스릴러 <화차>(2011)에서 전성기를 맞는다. 독립영화계의 투사에서 장르영화 감독으로 정체성을 확장시킨 사례로서 상징적인 인물이다.

정재은 1969~

정재은 감독.

데뷔작인 <고양이를 부탁해>(2001)는 제목과 포스터부터 신선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밀레니엄의 도래와 함께 스무살을 맞은 5명의 여고 동창생들이 주체적인 여성으로서 세계와 반목하고 화해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린 영화다. 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는 “생생하게 대상을 포착한다”, “언젠가 폭발할 수 있는 여백을 가진 영화”라고 평했다. 단편영화 <도형일기>(1999)가 주목받은 것을 계기로 정재은 감독은 여성 영화인의 물꼬가 트이는 2000년대 충무로의 지각 변동 한가운데 서 있었던 인물이다. 도심 속 인라인 스케이팅에 심취한 청춘들을 등장시킨 <태풍태양>(2005)에서 거친 정념으로 뛰어들었던 감독은 그 세밀한 관심을 사회로 확장해 다큐멘터리 <말하는 건축가>(2011), <말하는 건축 시티:홀>(2012), <아파트 생태계>(2017) 연출에 힘쏟았다. 공간에 대한 관심은 12년 만에 발표한 세 번째 극영화 <나비잠>(2017)에서도 확인된다. 다큐멘터리 <고양이들의 아파트> 등 내년까지 활발한 활동이 예정돼 있다.

황윤 1972~

황윤 감독.

한국 환경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황윤 감독. 동물원에 갇힌 야생동물들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작별>(2001)로 데뷔했다. 멸종위기 동물들의 마지막 터전인 백두산과 두만강 유역마저 개발되고 있음을 경고한 <침묵의 숲>(2004)과 로드킬 문제를 다룬 <어느 날 그 길에서>(2006)를 연이어 만들면서 인간과 야생동물의 공생이라는 화두를 확장시켰다. 한동안 휴식기를 가진 뒤 발표한 <잡식 가족의 딜레마>(2014)는 황윤 감독이 직접 자신의 생활 속에서 공장식 축산 시스템을 접하며 육식에 대해 재고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많은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실천적인 성찰에 가족적이고 유머러스한 분위기를 더해 새로운 영화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2014년 11회 서울환경영화제 한국환경영화상 대상을 수상했다. 황윤 감독은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선거에 녹색당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하면서 영화계 인사의 정계 진출로는 드물게 소수 정당 후보자로 기록됐다.

박찬옥 1968~

박찬옥 감독.

미술교사로 일하던 중 퇴직하고 27살에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박찬옥 감독은 청년필름에서 만든 단편 <느린 여름>(1998)으로 제3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선재상을 받았다. 이후 홍상수 감독의 <오! 수정>(2000)의 조감독 생활을 마치고 만든 데뷔작은 <질투는 나의 힘>(2002). 중독적인 질투와 호기심을 떨쳐내지 못하는 인물을 등장시켜 타인을 향한 부조리한 욕망을 적나라하게 끄집어 올렸다. 박해일의 첫 장편 주연작이기도 한 작품으로, 제32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 타이거상을 받았다. 두 번째 연출작 <파주>(2009)를 통해 재개발 구역을 무대로 통속적인 멜로드라마 서사를 풀어내며 지독한 감정들을 어루만진 박찬옥 감독은 이후 제작자로 변신을 꾀했다. <소셜포비아>(2014),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2014), <아기와 나>(2016), <수성못>(2017) 등 저력 있는 한국 독립영화들의 뒤편에서 그의 이름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이수연 1970~

이수연 감독.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2003)이 한국영화 개봉 스코어 신기록을 세운 2003년,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활력을 지닌 공포영화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이수연 감독의 데뷔작인 <4인용 식탁>(2003)은 남달랐다. 타인의 자살 소식이 연일 뉴스를 무심하게 스치는 서울의 삶. <4인용 식탁>은 어느 신혼집의 식탁에 지하철에서 목격한 죽은 어린아이들이 찾아온다는 설정 속에서 공포보다는 내면의 고통을 응시한다. 감독의 성향은 14년 후, 스릴러 장르의 재미를 배가한 <해빙>(2017)으로 재차 확인된다. 얼음이 녹은 한강 위로 떠오른 시체, 수면내시경의 부작용 등 한국사회의 디테일을 모아 중산층의 몰락을 담으려는 포부가 돋보인다. 시대와 빠르게 조응하는 주제 의식을 장르적으로도 매끈하게 조율해내는 이수연 감독, 아마 타고난 스토리텔러는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데뷔 전 반향을 일으켰던 단편영화 <>(1998), <물안경>(2000)에서의 재능을 장편 옴니버스영화 <이공>(2003), <가족시네마>(2012)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방은진 1965~

방은진 감독.

최은희 감독 이후 유명 여성배우가 영화감독으로 변신한 두 번째 사례가 된 방은진 감독. 연극 무대에서 활동하다가 1994년에 임권택 감독의 <태백산맥>으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이제는 컬트라고 불러봄직한 박철수 감독의 <301·302>(1995)로 청룡영화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등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는데, 역설적이게도 방은진 감독은 이 영화를 계기로 연기보다는 영화 현장의 메커니즘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됐다. 시종 밝은 모습으로 살인을 일삼는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 <오로라 공주>(2005)가 긴 준비 끝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110만 관객 동원과 함께 비평적으로도 우호적인 반응을 얻었다. 7년 후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용의자X>(2012)를 발표했고, 이어서 마약 운반책으로 발각당해 외딴섬에 수감된 한국인 주부의 실화를 각색한 <집으로 가는 길>(2013), 연극 무대 위 배우들의 감정을 스크린으로 불러낸 <메소드>(2017)까지 에너제틱한 행보를 이어오고 있다.

이언희 1976~

이언희 감독.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1기 출신. <고양이를 부탁해>(2001) 각색을 시작으로 영화계에 발을 디뎠다. 27살에 <…ing>(2003)를 통해 데뷔, 스크린에 얼굴을 알린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임수정의 풋풋한 연기와 함께 감각적인 영상미로 한국 멜로영화에 신선도를 더했다. 일본 어뮤즈엔터테인먼트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두 번째 장편영화 <어깨너머의 연인>(2007)은 직설적인 대사, 거침없는 성격을 지닌 여성 인물들을 통해 섹스에 관한 솔직한 고민을 풀어냈다. 세 번째 영화 <미씽: 사라진 여자>(2015)는 이언희 감독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가장 묵직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작품. 여성감독과 배우에 대한 필요가 공유되고 있던 시기에, 적시에 당도한 여성 주연의 스릴러 영화로 그 의미를 인정받았다. 이언희 감독은 다음 영화로 <탐정: 리턴즈>(2018)를 택해 코미디 장르로 영역을 넓혔다.

김일란 1972~

김일란 감독.

김일란 감독의 다큐멘터리가 아니었다면 스크린에서 보지 못했을 세계가 너무도 크다. 성적소수문화 환경을 위한 모임 연분홍치마에서 활동 중인 김일란 감독은 사회운동의 무대로 다큐멘터리를 택해 다양한 범주의 이슈를 스크린에 전달했다. 장편다큐멘터리 데뷔작이자 기지촌 성매매 여성들의 삶을 기록한 <마마상-Remember Me This Way>(2005), 성전환남성(FTM) 세명의 일상을 따뜻하게 포착한 <3xFTM>(2008) 등이 그 예다. 당시 한국 다큐멘터리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7만 관객을 동원한 <두 개의 문>(2012)은 2009년 용산참사를 기록한 작품으로 후속작 <공동정범>(2017)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반목과 부채감, 사회의 책임을 지속적으로 고민했다. <3xFTM> <두 개의 문>은 직접 촬영을, 연분홍치마 동료들의 영화인 <레즈비언 정치도전기>(2009), <종로의 기적>(2010)에서는 프로듀서로 일했다. 2012년, <뉴스타파2>의 앵커로도 발탁돼 성공적으로 활동을 마쳤다.

김진아 1973~

김진아 감독.

얼마 전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채수응 감독의 베스트 VR 경험상 수상 소식이 들려오기 전, 지난해에도 한국 VR영화의 괄목할 만한 성취가 있었음을 기억하고 싶다. 단편다큐멘터리 <동두천>(2017)으로 제72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베스트 VR 스토리상을 수상하고, 테살로니키국제영화제에서 VR 부문 대상을 수상한 김진아 감독의 이야기다. 1992년, 미군에 의해 살해당한 여성 성노동자의 이야기를 가상현실 다큐멘터리에 담았다. 장편다큐멘터리 <김진아의 비디오 일기>(2001), <그 집 앞>(2004)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해, 한·미 합작영화인 극영화 데뷔작 <두 번째 사랑>(2006)에서 베리 파미가와 하정우를 캐스팅해 파격적인 멜로드라마를 완성했다. 이후 다큐멘터리 <서울의 얼굴>(2009), 양자경이 출연한 극영화 <파이널 레시피>(2014)를 만들었다. 김진아 감독은 국제무대에서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비디오 아트를 넘나들며 매 작품에 이방인의 시선을 투영 중이며 현재 UCLA 교수로 재직 중이다.

부지영 1971~

부지영 감독.

교육심리학을 전공하고 한국영화아카데미를 거쳐 단편 <불똥>(1997), <눈물>(2002) 등이 영화제에서 수상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오! 수정>(2000)과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2003)의 연출부로 활동했던 부지영 감독은 2007년에 서로 판이하게 다른 자매의 로드무비인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로 데뷔했다. 옴니버스 프로젝트 <시선너머>(2010), <나나나: 여배우 민낯 프로젝트>(2011), <애정만세>(2011)를 통해 단편 작업을 꾸준히 선보이던 중, 부지영 감독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두 번째 작품 <카트>(2014)가 모습을 드러낸다. 부지영의 첫 번째 상업영화로 분류될 이 작품은 사회에서 소외된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을 다룬 영화로, 여성 캐릭터 한명 한명을 공들여 비춘다. 단편 <니마>(2010)에서 몽골 이주여성 노동자를 다뤘던 경험도 밑거름이 됐다. 중편영화 <산정 호수의 맛>(2011)에서는 부지영 감독의 섬세한 감정 연출을 확인할 수 있다.

김희정 1971~

김희정 감독.

폴란드 우츠국립영화학교에서 만든 단편 <언젠가>(2001)가 제6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부문상을 수상했다. 2007년 데뷔작 <열세살 수아>는 지금의 배우 이세영을 있게 한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희정 감독은 이세영을 활용해 기존의 새침한 이미지가 아닌 지극히 평범하고 내성적인 13살의 심리를 디테일하게 묘사한다. 감독의 자전적 경험을 토대로 한 작품으로, 아버지의 죽음 이후 진짜 엄마를 찾아나선 소녀 캐릭터가 손쉽게 대상화되지 않고 천천히 성장하면서 주체적인 여성 서사를 완성시킨다. 김희정 감독이 직접 칸국제영화제의 신인감독 지원 프로그램인 ‘레지당스 인 파리’에 지원해 파리에서 시나리오를 다듬어나간 작품으로, 이 프로그램을 통해 <청포도 사탕: 17년 전의 약속>(2012) 또한 마무리지었다. 현실과 기억 혹은 환상을 오가는 김희정 감독의 작품 세계는 <설행_눈길을 걷다>(2015)에서도 알코올중독자의 혼몽으로 발현된다. 한층 깊어진 서정성과 시적인 화면을 보여준 김희정 감독의 차기작은 서울과 파리를 오가며 전개되는 판타지 드라마 <프랑스 여자>다.

이경미 1973~

이경미 감독.

이쯤되면 '스타 감독'이라고 불러도 괜찮지 않을까. JTBC <전체관람가>에서 만든 이영애 주연의 단편영화 <아랫집>(2017)이 인기를 얻고, 올해 7월 발간한 에세이집 <잘돼가? 무엇이든>은 벌써 8쇄를 앞두고 있다. 동명의 영상원 졸업작품 <잘 돼가? 무엇이든>(2004)은 대학 졸업 후 해운회사에서 일했던 이경미 감독의 경험을 반영해 두 여성간의 반목과 이해를 그린다. 미쟝센단편영화제를 비롯해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호평받았다. 이후 박찬욱 감독의 제안으로 <친절한 금자씨>(2005)의 스크립터로 일한 이경미 감독은, 모호필름의 첫 코미디영화 <미쓰 홍당무>(2008)의 메가폰을 잡으며 데뷔를 알렸다. 두 번째 작품 <비밀은 없다>(2015)가 던진, “불균질하고 적대적인 에너지”(송경원 <씨네21> 기자)가 영화 팬들을 단숨에 매혹시킨 것처럼, 이경미 영화 속 여성들은 보편의 공감대에 구애받지 않고 살아서 꿈틀거린다. <미쓰 홍당무>의 미숙(공효진)과 <비밀은 없다>의 연홍(손예진), 그리고 일련의 범상치 않은 캐릭터들은 분명히 한국영화에서 전에 본 적 없었으나 내면에서 무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반가운 초상들이다.

홍지영 1971~

홍지영 감독.

1999년에 한국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한 홍지영 감독은 <서양 골동 양과자점 앤티크>(2008)를 각색하고 이어서 장편 데뷔작 <키친>(2009)을 만들었다. 한 부엌을 공유하는 세 남녀의 유쾌한 로맨스 서사와 팬시한 분위기로 주목받았다. 특유의 달콤하고 화사한 멜로드라마는 두 번째 영화 <결혼전야>(2013)에서 결혼을 앞둔 다섯 커플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한편 홍지영 감독은 단편 작업을 통해 보다 진중한 감수성을 드러내기도 했는데, 옴니버스영화 <가족시네마>(2012)의 단편 <별 모양의 얼룩>은 딸을 잃은 엄마의 혼란스러운 애도 과정을, <무서운 이야기>(2012) 속의 <콩쥐 팥쥐>에서는 의붓 자매의 질투와 의심을 호러 장르의 동력으로 치환해냈다. 세 번째 작품인 김윤석 주연의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2016)는 메이저 배급사(롯데)가 배급한 홍지영 감독의 첫 번째 영화다.

김소영 1961~

김소영 감독.

영화감독이자 평론가, 교수를 겸하며 트랜스적 시선으로 세계를 포착해내는 김소영 감독. 여성영상집단 바리터 출신으로 한국영화아카데미 1기생이며 미국 뉴욕대에서 영화이론을 전공했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아시아영화에 대한 활발한 연구를 이어가는 학자이면서 <김소영의 영화 리뷰: 친구에게 들려주는 96편의 영화 이야기>(1997), <비상과 환상>(2014) 등의 저서를 통해 영화평론가로도 익숙한 인물이다. 첫 장편다큐멘터리 <거류>(2000)는 한반도 남쪽에 사는 여러 여성들의 삶과 언어를 기록한 작품. 단편 <황홀경>(2002), 중편 <원래, 여성은 태양이었다: 신여성의 퍼스트 송>(2004)과 함께 여성 3부작을 이룬다. 장편 극영화 데뷔작인 <>(2009), 유라시아에 이산된 고려인들을 좇은 3부작 <눈의 마음: 슬픔이 우리를 데려가는 곳>(2014), <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2016), <굿바이 마이 러브 NK>(2017)를 통해 최근까지 왕성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신수원 1967~

신수원 감독.

교사 출신의 영화감독. 영상원 졸업 후 비교적 늦은 데뷔에도 불구하고 다채로운 이력을 채운 신수원 감독은, 영화감독 지망생인 엄마와 15살 아들의 좌충우돌기를 그린 <레인보우>(2009)로 데뷔했다. 그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각인된 것은 <가족시네마>(2012)의 옴니버스 단편 중 하나였던 <순환선>이 제65회 칸국제영화제의 비평가주간 카날 플러스상을 수상하면서다. 임신한 아내에게 해고 사실을 알리지 못하고 지하철 순환선에 몸을 싣는 40대 남자의 이야기인 <순환선> 이후, 신수원 감독은 연이어 한국 사회의 서늘한 단면을 고발해왔다. <명왕성>(2012)은 스터디그룹을 소재로 잔인한 교육 현실을 꼬집고, <마돈나>(2015)는 장기기증 동의서를 받으려는 간호사가 한 여성의 삶을 추적해 나가면서 진실을 목격한다. <유리정원>(2017)에 이르러 신수원 감독의 영화는 이제 강력한 주제의식을 넘어 영화적 아름다움을 탐닉하는 새로운 세계로 진입한 듯 보인다. 신수원 감독의 영화 세계는 서영희, 문근영, 권소현 등 여성배우의 진면모를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보람 있는 필모그래피다.

안선경 1972~

안선경 감독.

<귀향>(2009), <파스카>(2013), <나의 연기 워크샵>(2016). 안선경 감독이 어느덧 세편의 영화를 길어올렸다. 대학 시절 연극 동아리 활동에 몰두하고 졸업 후 연희단거리패에 몸담은 적 있는 안선경 감독은 알베르 카뮈의 희곡 <오해>에서 영감을 얻어 데뷔작 <귀향>을 연출했다. 허름한 모텔 주변을 무대로 한, 연극적인 요소가 다분히 느껴지는 작품으로 고 김기영 감독의 페르소나로 불렸던 배우 이화시의 복귀작으로도 관심받았다. 안선경 감독은 특히 부산국제영화제와 인연이 깊다. 40살의 시나리오작가와 19살 소년의 사랑을 탐구한 <파스카>는 18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뉴커런츠상을, 연극 무대에서의 경험을 되살려 배우들의 고뇌를 담은 <나의 연기 워크샵>은 21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비전 부문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윤정 1980~

이윤정 감독.

서강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칼아츠 대학원에서 영화를 공부한 뒤 <달콤, 살벌한 연인>(2006),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의 스크립터로 경력을 쌓았다. 기억을 잃고 자기 자신을 실종신고한 남자와 그를 기억하는 여자의 러브 스토리인 <나를 잊지 말아요>(2015)로 데뷔했다. 근래 한국영화계에서 보기 드문 정통 멜로를 표방한 작품이다. 이윤정 감독은 애초에 장편을 계획하고 파일럿 형식의 단편영화를 앞서 제작했는데, 동명의 단편영화 <나를 잊지 말아요>(2010)는 제10회 미쟝센단편영화제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부문에서 상영됐다. 이윤정 감독은 데뷔작의 제작비 마련을 위해 북미 중심의 펀딩 사이트 ‘킥스타터’를 활용해 월드와이드 모금을 진행하는 독특한 선례를 쌓기도 했다. 지난해 4월에는 한국여성민우회와 더불어민주당 진선미, 도종환 의원이 주최한 ‘미디어 내 성평등을 위한 연속토론회’에 참가하는 등 여성 영화인의 미래에 귀기울이고 있는 든든한 신인감독이다.

구혜선 1984~

구혜선 감독.

해묵은 표현이지만 온라인 ‘얼짱’에서 스타가 된 1세대 배우인 구혜선에 대한 인상은 미디어의 시선에 흽쓸리지 않고 언제나 독특한 감수성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4차원’이라는 수식어는 다소 경박하게 들릴지 몰라도 은유적으로 그리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 그건 다름 아닌 구혜선의 뚝심을 가리키는 말이다. 영화 연출에 관심을 가지면서 만든 첫 번째 단편영화 <유쾌한 도우미>(2009)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와 연을 맺은 구혜선 감독은 이듬해 바로 장편 데뷔작 <요술>(2010)을 발표했다. 데뷔작에 대한 평가가 마냥 우호적이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차기작 <복숭아나무>(2012)에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요술>의 음악가, <복숭아나무>의 작가, 그리고 <다우더>(2014)에서 감독이 직접 연기한 모녀 관계까지 자신의 고민과 관심사에 몰두한 작품들이기에, 여성감독이 강한 자의식을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반갑다.

노덕 1980~

노덕 감독.

몇 편의 단편영화를 만들고 <지구를 지켜라!>(2002) 스크립터로 시작한 노덕 감독은 서울예술대학에서 영화 연출을 전공했다. <연애의 온도>(2012)를 시작으로 <특종: 량첸살인기>(2015)까지 두 편의 장편영화를 만들며 자신만의 자리를 만들었다. 현실적인 멜로영화 <연애의 온도>와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걷잡을 수 없이 큰 사건에 휘말리게 된 한 남자의 뒤를 쫓는 <특종: 량첸살인기>는 서로 다른 스타일이지만, 그로 인해 ‘스토리텔러’ 노덕 감독의 재능과 너른 스펙트럼을 확인케 해준다. 또래 여성 감독들 중에서 2편 이상의 장편영화를 만든 여성감독 자체가 드물다는 사실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신작을 애타게 기다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주리 1980~

정주리 감독.

중국집에서 벌어지는 코믹한 상황을 부조리극에 가깝게 풀어낸 단편영화 <영향 아래 있는 남자>(2007)로 제12회 부산국제영화제 선재상을 수상했다. 성균관대 영상학과와 영상원 전문사를 졸업한 정주리 감독이 만든 장편영화는 아직 단 한편뿐이다. 데뷔작 <도희야>(2014)는 폐쇄적인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세상의 학대로부터 서로를 지키는 두명의 여성을 불러낸다. 고통과 핍박으로 물든 이 드라마에서 여성 인물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희와 영남이라는 자신의 고유명사를 잃지 않는다. 칸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되며 국내에서도 주목받았고, 백상예술대상 신인감독상, 들꽃영화상 시나리오상 등을 수상했다.

윤가은 1982~

윤가은 감독.

2015년, 누구도 이만큼 흥행하리라 예상하지 못했던, 초등학생들의 날 선 동화가 약 5만 관객을 동원했다. 윤가은 감독의 장편 데뷔작 <우리들>(2015)에는 서로의 차이를 알아가는 두 초등학생이 어른들의 무심함과 또래 집단의 이기심 속에서 겪는 여름날의 열병이 또렷하게 담겨 있다. 영상원 재학 시절에 만든 단편 <사루비아의 맛>(2009), <증명>(2010), <손님>(2011) 등을 통해 그의 타고난 섬세함을 본 적 있는 관객에겐 이미 예견된 성공일 수도 있겠다. 이혼가정의 자녀가 자신의 의붓 형제를 우연찮게 만나게 되면서, 낯선 유대감을 느끼는 <손님>은 2012년 제34회 클레르몽페랑국제단편영화제 국제경쟁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콩나물 심부름에 나선 7살 소녀의 여정을 담은 <콩나물>(2013)에 이어 <우리들>은 윤가은 감독의 부드러운 리더십이 아역배우들과 소통하는 지점에서 빛을 발함을 보여준다. 현재 차기작 제작에 여념이 없는 윤가은 감독은 한국영화계의 든든한 보배다.

정가영 1990~

정가영 감독.

지면을 쪼개어 90년대생 여성감독들에 대해서도 간단히 소개해보고 싶다. 정가영 감독의 대범하고 유쾌한,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은 작품 세계는 새로운 세대의 출현을 알리는 듯하다. 지금껏 감독이 직접 연기해온 여성 인물들은 과거 홍상수 영화 속의 남성 주인공이 여성으로 치환된 듯, 지질하고 방만한 욕망을 주저 없이 드러낸다. 장편 데뷔작 <비치온더비치>(2016)와 <밤치기>(2017)에선 누군가와 하룻밤 자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한 여성의 언어가 즐겁고 발칙하게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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